[사람사람] 연극에 푹 빠진 소아과 명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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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어제는 연습이 새벽 3시에 끝났어요. 괜찮아요. 의사들은 원래 밤새는 걸 밥 먹듯 하잖아요."

서울대 의대.간호대 연극반 창립 40주년 기념공연 '시민의 적'(4~7일, 서울 대학로 동덕여대공연예술센터)의 연출을 맡은 이항(63) 한양대병원 소아과 교수. 공연 날짜가 코 앞에 닥치다보니 현역 의료인인 제작진과 출연진이 밤마다 강행군을 거듭하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

'시민의 적'은 '인형의 집'으로 유명한 노르웨이 극작가 헨릭 입센이 쓴 또 다른 대표작이다. 휴양도시의 온천이 오염된 사실을 발견한 의사가 이를 세상에 알리려 하지만 시장.기자 등 여타 도시 구성원들이 경제적 이해 때문에 발표를 막는다는 내용이다. 이들은 급기야 의사를 도시의 적으로 몰아붙이기까지 한다. 이전에 '민중의 적'이란 제목으로 소개됐던 작품을 이 교수가 새로 번역하며 '의사는 시민의 적'이라 이름 붙였다가 불필요한 오해를 살까 싶어 지금의 제목으로 바꿨다.

"미래를 생각하는 소수가 사회의 적이냐, 아니면 그런 소수를 적으로 모는 우중(愚衆)이 적이냐 하고 질문을 던지는 작품입니다. 결론을 향해 몰아가지 않고 모두가 한번 생각할 기회를 갖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췄습니다."

이 교수는 "의사를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시각이 많은 이 시대에 의사들 입장에서도 무조건 방어적인 자세만 취할 게 아니라 왜 그렇게 됐는지 성찰해보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의학계에서 소아혈액종양 분야의 권위자로 꼽히는 이 교수는 연극계에도 이름이 상당히 나 있다. 미국 시카고의대에 재직하다 1980년대 초 귀국한 이래 경기고 출신 연극동우회인 '화동연우회'와 서울대 의대 연극반 출신 모임인 '의극회'의 공연에서 세 차례 연출을 맡았다. 기성극단인 한양레퍼토리의 '러브레터'(2001년), 돌곶이의 '물질적인 남자'(2003년)에선 비중있는 배역을 맡아 무대에 섰다. 올 봄 개봉할 영화 '안녕 형아'에 본업인 소아과 의사역으로 나온다.

"그래봤자 아마추어 연극인이죠. 하지만 관객으로선 프로입니다."

그의 말마따나 그는 미국에서 살 때 주말마다 크고 작은 공연장을 찾았다. 60년대 말 뉴욕에서 아서 밀러가 각색한 '시민의 적'을 본 뒤엔 '우리 의사들과 한번 해봐야지'하고 점찍어두기도 했다.

노르웨이 대사관이 이번 공연의 후원을 맡아 5일 오후 5시 공연장 부근에서 리셉션까지 열어준다.

글.사진=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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