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대한민국 외교부의 부끄러운 자화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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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이 그제 이명박 대통령에게 사표를 제출했다. 딸 현선(35)씨의 외교부 특채 논란이 불거진 지 이틀 만이다. 청와대 관계자는 “사의를 반려하지 않을 것으로 안다”고 밝혀 사표 수리가 확실시되고 있다. 이명박 정부 출범과 함께 입각해 최장수 장관이 된 유 장관은 이번 파문으로 2년7개월 만에 중도 하차하면서 37년 외교관 경력에 치명적 오점을 남기게 됐다. 유 장관의 낙마(落馬)는 개인의 불명예를 넘어 외교부 전체의 치욕이고 불명예다. 수장(首將)의 추락을 계기로 외교부는 부끄러운 자화상을 돌아보고, 조직의 면모를 일신해 대한민국 외교가 거듭나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유 장관은 본연의 업무 때문이 아니라 자녀 특채 논란으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바나나 공화국’도 아니고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주최하는 나라에서 벌어진 일이다. 당장 두 달 후 서울에서 열릴 G20 정상회의 참가국들에는 뭐라 설명할 것인가. 우리 사회가 아직 이 수준밖에 안 되나 싶은 자괴감에 고개를 들지 못하겠다는 국민이 많다. 유 장관 한 사람 사표 받는 것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이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조사를 진행 중인 행정안전부 감사팀은 유 장관 딸의 채용 과정을 한 점 의혹 없이 낱낱이 밝혀야 한다. 문제가 드러나면 모든 관련자들에게 엄중히 책임을 물어야 한다. 유 장관 딸의 신분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채용 절차가 진행됐다는 외교부의 거짓 해명에 대해서도 책임 추궁이 있어야 한다. 계약직으로 특채돼 현재 외교부에서 근무 중인 외교관 자녀 7명의 채용 과정에 대해서도 감사팀이 살펴보기로 한 만큼 이 역시 철저히 흑백을 가려야 한다. 그것이 역(逆)차별 논란을 잠재우고, 억울한 피해를 막는 길이기도 하다.

홍정욱(한나라당) 의원이 외교부로부터 제출받은 국감 자료에 따르면 1997년부터 2003년까지 시행됐던 외무고시 2부 시험을 통해 선발된 22명 중 9명(41%)이 외교부 고위직 자녀였다. 유 장관 딸 특채 논란을 계기로 이들에 대해서도 국민은 의혹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외국어 특기와 외국 생활 경험에서 외교관 자녀들이 유리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너무 비율이 높지 않으냐는 것이다. 더구나 2012년을 끝으로 외무고시가 폐지되고, 2013년부터는 외교아카데미를 통해 외교 전문인력을 선발하게 돼 있다. 이 또한 외교관 자녀에게 유리할 개연성이 크다. 선발 절차의 투명성과 공정성 확보가 관건임을 명심해야 한다.

장관 딸이 나 홀로 채용되는데도 외교부 내에서 문제 의식을 갖고 직언한 직원이 아무도 없었다. 장관과 같은 고교와 대학 출신이 측근으로 중용되면서 외교부는 ‘서울랜드’라는 말이 나돌기도 했다. 파벌과 인맥이 작동하고, 무사안일과 보신주의에 빠진 조직 문화에서 창조적 외교는 언감생심이다. 눈치 안 보고 소신껏 제 할 일 하는 사람이 출신과 상관없이 중용되는 외교부로 다시 태어나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