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까지 이어진 북방 DNA, 성리학에 밀려 소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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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호 20면

『용비어천가』 86장에는 “어린 이성계가 말을 타고 활을 쏘아 여섯 노루와 다섯 까마귀를 떨어뜨리고 비스듬한 나무를 넘어서 다시 말에 올라탔다”는 기사가 나온다. 달리는 말 위에서 활을 쏘고 물구나무를 선 채, 좌우로 바꿔가며 말을 옮겨 타는 몽골의 마상 무예를 연상케 한다. 이성계의 뛰어난 말타기 실력엔 그의 가문이 가진 몽골적 속성이 반영돼 있다.

『조선왕조실록:태조실록총서』에 따르면, 이성계의 고조부 이안사(穆祖)는 지금의 연변자치주에 있는 오동(斡東)을 근거지로 구축했고, 1255년에 칭기즈칸의 막내 동생인 옷치긴 왕가를 통해 몽골제국에서 남경(南京, 지금의 연길) 일대를 지배하는 천호장 겸 다루가치 직위를 받았다. 이후 조부 이행리(翼祖)가 1300년에 쌍성 등지의 다루가치가 된 이래 이춘(度祖)→이자춘(桓祖)→이성계로 이어지며 직위를 세습해 왔다. 부얀테무르(이춘), 울루스 부카(이자춘) 라는 몽골 이름도 썼다.

이춘의 아들들의 이름은 타수푸카, 울리제이 부카였다. 태조 이성계가 태어난 곳도 몽고의 고려 지배 기구인 쌍성총관부가 있던 영흥부(회령)였다. 이성계 부자가 고려에 귀순하기 직전까지 근 백년간 그들은 몽골제국의 몽골국인이었다. 오늘날 중국의 조선족과 유사했다.

특히 이성계는 1362년 몽골 최고 군벌 세력인 나가추의 고려 침략을 격퇴하는 과정에도 친병 1000여 명을 동원해 몰이사냥, 우회전술과 산악전 등의 방식으로 적군을 격파하는 등 몽골적 특성을 발휘했다. 이런 특성은 조선 초기 북방정책에도 그대로 반영돼 요동 정벌론이나 신기전 등의 무기 개발로 연결됐다.

몽골 제국의 몰락이라는 국제정세를 꿰뚫으며 신흥 사대부와 손잡고 1392년 창업된 이성계의 조선왕조는 친명사대(親明事大)를 표방했지만 실은 북방 유목 제국적 전통을 견지했었다. 초기 조선조는 스키토ㆍ시베리안 북방민족사적 정통성을 담아낸 신왕조라고 재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전통은 이후 조선조의 학문적 기반이었던 성리학에 밀려 자취를 감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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