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자기 콘텐트 없이 창조 경제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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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한국의 콘텐트 홀대는 방송시장을 보면 안다. 전업 콘텐트 생산자들이 죄다 의욕을 잃고 있다. 콘텐트를 만들어도 케이블·위성·IPTV와 같은 유료매체에 내걸기가 힘들다. 케이블의 경우 2001년 PP(프로그램 사업자) 허가제가 등록제로 바뀌면서 200개에 달하는 업체가 난립하고 있다. 디지털 전환 도중이라 70개 이상 채널을 한 플랫폼에서 제공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100여 개 PP사업자들은 휴·폐업 상태다. 어렵사리 채널을 사용한다 해도 돈을 벌지 못한다. 지상파 계열 브랜드와 홈쇼핑 등에 가려 버린 군소 일반 PP들은 창작 콘텐트로 수익을 얻는다는 기대를 접은 지 오래다.

지난해 방송광고시장 점유율을 보면 74.1%를 지상파 방송사와 지상파 계열 PP가 차지하고 있다. KBS·MBC·SBS 계열로서 드라마·예능·스포츠와 같은 인기 콘텐트 재방송에 특화한 지상파 3사 계열 PP들은 전체 PP 매출의 32.6%를 챙긴다. 이러니 한정된 시장에서 가져갈 몫이 줄어들어 자본 잠식, 당기 순손실 딱지를 붙인 사업자가 수두룩하다. 영세 PP들은 값싼 수입 콘텐트를 조달하거나 재탕, 삼탕한 지상파 콘텐트에 매달리는 판이다. 결국 PP의 경쟁력은 날로 떨어져 시청률 0%대를 헤맨다.

어쩌다? 무엇이 다양하고 창의적인 문제작들의 수원지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했던 케이블TV와 같은 유료방송시장을 콘텐트의 무덤으로 만들었나?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제품도 없이 장사를 해보겠다는 신기루(蜃氣樓)에 있다. 스스로 콘텐트 제품을 만들지 않고서도 임시 변통해 미디어 사업을 할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이 업계에 쫙 깔려 버렸다. 이 맹신(盲信)은 국내 PP 전체를 통틀어 한 해 달랑 2500억원대에 머문 자체 제작 투자비로 나타났다. 미국 프리미엄 유료채널 HBO 한 회사의 연 제작비 1조6400억여원에 심하게 대비된다.

이처럼 초라한 한국 PP들의 제작비 이면에는 가구당 월 5달러 정도인 세계 최저 수준의 낮은 수신료와 같은 고질적 병목이 있다. 이 밖에도 줄어든 수신료 수익배분 몫이나 과도한 광고규제, 어린이 채널 방송시간 규제 등 여러 요인이 짓누르고 있다.

이 무거운 부담으로 공영 매체 지상파보다 자유롭고, 너무 벤처적인 인터넷 동영상보다 진중한 콘텐트의 본무대, 유료방송의 멋진 향연이 시들어가고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상파들이 케이블 재송신 콘텐트에 대해 유료 보상을 요구하고 있다. 이 정도로 사방이 막힌 그들의 험난함을 도울 수 있을까?

우선 첫째 PP를 비롯한 유료방송시장의 콘텐트 생산을 북돋워야 한다. 기술 이전도 노하우 전수도 없는 수입 브랜드에 밀착하는 업체보다는 손수 콘텐트를 창출하는 전업 제작사에 힘을 실어 줘야 한다. 정부는 PP 심사를 강화해 철저하게 콘텐트 기획과 제작능력이라는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 이미 포화상태에 이른 드라마·예능과 전혀 다른 새로운 장르의 콘텐트를 창출한 업체를 집중 지원하는 게 맞다. 전 세계 다양한 디지털 콘텐트를 모은 애플 앱스토어가 신개념 PP의 힌트다. 종합편성PP 선정에서도 자체 제작역량과 창의적 방송 포맷, 고품질 콘텐트 개발에 대한 의지를 꼼꼼히 확인해야 한다.

다음으로는 PP와 같은 콘텐트 업체가 회생하고 자립할 기반을 제때 마련해 줘야 한다. PP들이 저예산 상업 콘텐트를 만들어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도록 하는 스토리뱅크 개념의 디지털소스포털·디지털방송지원센터와 같은 유·무형 인프라가 긴요하다.

셋째 방송의 장점과 영화·게임·모바일 등의 강점을 크게 섞는 콘텐트 상생 작업을 본격화해야 한다. 더 늦추면 애플TV와 구글TV가 그야말로 스마트하게 우리네 시청각시장을 석권할지 모른다.

PP가 커져 유료방송시장을 살리면 우리 콘텐트가 풍부해진다. 풍성한 콘텐트는 미디어산업을 키워 IT·금융·교육 등 미래 성장 엔진 모두를 튼튼하게 해준다. 좋은 콘텐트라야 지식기반경제에서 창조기반경제로 올라설 기분을 업 시켜 주기 때문이다.

심상민 성신여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