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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룡 총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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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잠룡물용(潛龍勿用)’이란 말이 있다. 글자 그대로 풀면 ‘물에 잠긴 용은 쓰지 말라’이다. 『주역(周易)』의 앞부분에 보인다. 『주역』은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이루는 경서이지만 점술책 이미지로 더 널리 인식되기도 한다. 그러나 『주역』은 음양(陰陽)의 원리를 바탕으로 인간의 마땅한 도리와 처세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지혜의 보고(寶庫)다. 그래서 『주역』 속 ‘잠룡물용’을 처세의 교훈 쪽에 더 무게를 두고 해석하기도 한다.

『주역강의』를 쓴 역술인 서대원이 그렇다. “인격을 갖추지 못하고 능력이 모자라면 설치지 말고 때를 기다리라”는 것이다. 잠룡은 우주의 맨 처음 상태를 이르는 무극(無極)의 시절 혹은 그 시기에 있는 사람을 상징한단다. 인간으로 따지면 아직 배 속의 생명체에 불과하니 어디에도 쓸 곳이 없다는 거다. 잠룡의 때에 있는 줄도 모르고 일찌감치 나서 설치다가 낭패를 보는 사람들에게 더 배우고 힘을 기르라고 하는 준엄한 가르침이다.

동양에서 용은 신령스러운 동물이며 권위의 상징이었다. 제왕(帝王)을 용에 비유한 까닭이다. 그러니 왕의 얼굴은 용안(龍顔)이요, 왕의 의자는 용상(龍床) 혹은 용좌(龍座)다. 왕이 타는 말은 용기(龍騎), 수레는 용여(龍輿) 또는 용거(龍車)라고 불렀다. 왕이 되기 전 단계는 잠룡이다. 제왕의 지위에 올라야 비룡(飛龍)이다. 조선시대 한성의 역사를 기록한 『한경지략(漢京識略)』에 보면 인조가 반정(反正)으로 왕위에 오르기 전 머물던 사저인 어의궁(於義宮)엔 잠룡(潛龍)이라는 연못이 있었다. 잠룡을 자칭한 인조가 비룡의 꿈을 이뤘던 셈이다.

인조와 반대의 경우도 역사 속에 숱하다. 당나라 덕종에게 반기를 들었던 ‘주차’는 장안(長安)을 점령하고 사저에 잠룡궁(潛龍宮)이란 이름을 붙였다. 당시 식자(識者)들은 ‘잠룡물용’을 들먹이며 패할 징조라고 수군거렸다. 주차는 결국 측근에게 목숨을 잃고 비룡의 꿈을 접는다. 1997년 신한국당에서 탈당해 독자 출마한 이인제 후보의 대선운을 따진 재야 역학자가 얻은 괘(卦)가 ‘잠룡물용’이다. 결과는 낙선이었다.

자유선진당 이회창 대표가 그제 “다음 총리는 일할 수 있는 사람을 뽑아야지, 잠룡이 될 사람은 안 된다”고 했다. 차기 대권 주자 운운했던 김태호 총리 후보자의 낙마를 염두에 둔 말이지 싶다. 임명권자인 대통령도, 새 총리 후보자로 뽑히는 사람도 새겨야 할 구절, 바로 ‘잠룡물용’이다.

김남중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