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혈한 필리핀” vs “졸렬한 중국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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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홍콩 관광객 8명이 숨진 필리핀 인질 사태의 후폭풍이 거세다. 참극이 빚어진 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홍콩의 반발이 중화권으로 확산되면서 대립이 더욱 날카로워지고 있다. 중화권에선 홍콩인·중국인과 동남아 화교의 필리핀 관광이 중단되고, 중국 고위 인사의 필리핀 방문도 취소됐다. 이에 발끈한 필리핀인들도 ‘졸렬한 중국인’이라고 맞서는 등 양측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하고 있다.

◆중화권, “필리핀 가정부 해고하자”=29일 홍콩섬 빅토리아 파크에서 열린 추모 집회에는 8만 명이 모였다. 참가자들은 지팡이를 쥔 80대 노인부터 중국인 관광객, 유모차 부대 등 다양했다. 6·4 천안문 사태 희생자 추모 집회를 빼면 홍콩에서 이런 대규모 추모 행사는 드문 일이다. 추모객들은 희생자 애도와 함께 ‘철저한 진상조사’를 요구했다. 상하이에서 온 관광객 천팡단(陳方丹·36)은 “필리핀 국민이 그렇게 허망하게 목숨을 잃었어도 필리핀 대통령이 웃으며 기자회견을 하고 사고 버스 앞에서 경찰들이 사진을 찍을 수 있었겠나”라며 분통을 터트렸다.

특히 27일 인질범인 롤란도 멘도사의 장례식에서 유족들이 필리핀 국기를 관에 덮은 게 알려지면서 비난 여론이 더 날카로워졌다. 필리핀 주재 중국대사관은 성명을 통해 인질범을 ‘냉혈인간’이라며 유족들의 행동에 반감을 드러냈다.

일부 네티즌은 인터넷 게시판에 ‘필리핀 가정부들을 해고해 우리의 분노를 보여주자’며 대중의 반(反)필리핀 감정을 자극했다. 홍콩에서 취업한 필리핀인 13만 명이 보내는 돈이 필리핀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필리핀에 타격을 주자는 것이다.

필리핀 정부는 파문 수습에 부심하고 있지만 양국 외교 전선에는 냉기류가 흐르고 있다. 중국 정부는 리커창(李克强) 부총리의 다음 달 초 필리핀 방문 계획을 취소했다. 조문 차원의 제호마르 비나이 필리핀 부통령의 중국·홍콩 방문도 연기됐다.

◆필리핀, “졸렬한 중국인”=중화권의 십자포화가 계속되자 필리핀에서도 반중 기류가 고개를 들고 있다. 홍콩 명보(明報)는 30일 “프란시스코 팡지리난 필리핀 상원의원이 ‘중국 대사관의 성명은 주권침해’라며 반발하자 찬성 여론이 확산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팡지리난 의원은 “필리핀과 중국의 국가 사정은 다르다. 개인의 인권과 자유가 보장되는 필리핀에서는 국기로 관을 덮든 말든 유족의 자유”라고 말했다고 명보는 덧붙였다.

홍콩 봉황위성TV는 “(중화권의 과도한 반응에) 필리핀 사람들이 발끈하면서 반 중국정서가 강해지고 있다”고 전했다. 필리핀 네티즌들도 “분풀이를 힘없는 가정부에게 하자는 것만 봐도 중국인의 졸렬한 기질은 어쩔 수 없다”고 반중 감정을 드러냈다.

홍콩=정용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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