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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화장실서 잠자고 곳곳서 대낮부터 술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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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하루평균 20만명이 이용하는 서울의 관문 서울역이 노숙자들로 홍역을 치르고 있다. 지난해 문을 연 서울역 신역사에는 요즘 하루 평균 400여명의 노숙자들이 몰려들고 있다. 이 때문에 이용객들은 대합실·화장실 등을 '점령'한 노숙자들의 눈치를 봐야하는 불편을 감수하고 있다. 서울 시내 노숙자들은 서울역뿐 아니라 지하철 명동역·시청역·을지로역 등지에 흩어져 있다. 하지만 공간이 넓고, 시설이 현대적이라서 서울역은 가장 인기있는 '거처'가 되고 있다.

"또 여자화장실 문이 잠겼어요. 도와주세요."

25일 오전 9시. 비품을 챙기던 서울역 신역사 청소반장 이은수(53)씨에게 청소원 남상분(58.여)씨가 찾아왔다. 자신이 담당하는 2층 여자화장실에 누군가가 문을 걸어 잠근 채 나오지 않는다는 하소연이었다.

현장을 찾은 이씨는 노크하고 고함도 질러봤지만 대답이 없었다. 결국 철도 공안원의 도움을 얻어 사다리를 걸고 안으로 넘어갔다. 그제야 허름한 행색의 40대 남성 노숙자는 "잠도 못 자느냐"며 퉁명스럽게 쏘아붙인 뒤 빠져나갔다.

한 시간 뒤, 이번엔 철도공사 공안분실에서 "출입구 쪽에서 술판을 벌이던 노숙자들을 내보내는 중이니 청소를 부탁한다"는 연락이 왔다. 현장에선 공안원들이 라면 국물을 안주 삼아 소주를 마시는 노숙자 6명과 승강이를 벌이고 있었다. 공안원들이 "나가서 바람 좀 쐬고 오라"며 노숙자들을 달래는 모습을 지켜보던 이씨는 "서울역 청소원이나 공안원 업무의 절반 이상이 노숙자들 뒤치다꺼리"라며 한숨을 쉬었다.

▶ 서울역 청소반장인 이은수씨가 25일 새벽 한 노숙자가 자고 있는 서울역 화장실에서 바닥을 청소하고 있다.신인섭 기자

늘어난 노숙자 때문에 이용객들이 겪는 가장 큰 불편은 화장실 이용. 난방이 잘 되고 따뜻한 물이 나와 하루종일 노숙자들로 북적거리기 일쑤다.

목욕이나 흡연은 보통이고, 아예 바닥에 누워 자거나 대낮부터 화장실 바닥에 둘러앉아 술판을 벌인다. 이런 모습에 놀라 '급한 용무'로 화장실을 찾은 승객들은 그냥 돌아설 수밖에 없다.

청소원은 물론 공안원.경찰관조차 이런 노숙자들의 눈치를 살필 정도다. 큰소리라도 치면 앙심을 품은 노숙자가 세면대에 물을 틀어놓는 등 화풀이를 하기 때문이다. 때론 화장실 쓰레기통에 불을 지르기도 한다.

지난해 9월 3층 화장실을 청소하던 최모(57.여)씨는 빨래하며 바닥을 '물바다'로 만든 노숙자에게 훈계조로 한마디 했다가 멱살을 잡히는 수모를 겪었다. 최씨는 "경찰관을 데려왔지만 노숙자는 오히려 큰소리쳤다. 그 뒤론 아무 말 못한다"고 말했다. 대합실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낮 시간에도 대합실 의자의 3분의 1은 술 취한 노숙자들이 차지한다. 심지어 유아용 놀이방에 드러누운 노숙자도 목격됐다.

승객들을 더 위축시키는 것은 크고 작은 폭력 사건. 낮에 밖으로 나갔던 노숙자들이 하나 둘 돌아오는 저녁 6시, 2.3층 대합실 곳곳에서 노숙자끼리 몸싸움이 벌어졌다. 이날 하루 동안 기자가 지켜본 노숙자들의 싸움만 8건. 주먹다짐이 날 때마다 주변에 있던 시민들은 황급히 달아났다. 술 취한 노숙자들의 싸움에 놀란 정재엽(32)씨는 "평소 노숙자들의 처지를 동정했지만 이건 너무 심한 거 아니냐"며 불평했다. 때론 성희롱 사건까지 벌어진다고 한다. 지난해 11월 한 노숙자가 갑자기 매표소 여직원을 뒤에서 껴안는 사건이 일어났다. 충격으로 그 직원은 2개월 동안 병원에 입원치료를 받았다고 동료들은 전했다.

서울역의 모든 노숙자가 '무법자'는 아니다. 청소반장 이씨는 "서울역 노숙자의 절반은 오전 5시에 인력시장에 나가는 등 재활 의지를 버리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낮부터 술에 취해 종일 서울역을 맴도는 일부 노숙자에게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노숙자들은 자신들의 딱한 처지를 이해해 달라는 입장이다. 2층 화장실에서 재활용품을 수집하던 노숙자 양모(44)씨는 "날이 추워지고, 할 일은 없는데 서울역에서 쫓겨나면 살길이 막막하다"고 털어놓았다.

천인성 기자
임병철 인턴기자(한서대 신방과3)
사진=신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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