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사기를 쳐도 역시 ‘규모의 미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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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세계경제를 뒤바꾼 20가지 스캔들
포춘 편집부 지음, 김선희 옮김
서돌, 412쪽, 1만6000원

13년 전 외환위기 당시 한국 경제가 거덜난 건 열등한 제도와 관행 탓이라고 했다. 혈연과 지연 등에 비즈니스가 좌우되니 부정과 부패가 난무한다는 지적이었다. 그러니 한국도 투명성을 높여, 미국처럼 맑은 정부와 깨끗한 기업을 만들라는 게 미국과 국제통화기금의 주문이었다. 그게 정말 터무니없는 얘기라는 게 불과 얼마 뒤 입증됐다.

2002년 발생한 미국 최대 에너지회사 엔론의 부정과 비리가 그것이었다. 미국 포천 500대 기업 중 7위를 차지하던 회사가 유령회사를 만들어 수십억달러를 회계 장부에서 누락했고 최소한 6억 달러 이상을 조작했다. 이같은 회계부정에 세계적인 회계법인 아더 앤더슨이 공모했다. 분식을 방조하고 관련 문서까지 파기했다. 이쯤 되면 엔론이나 한국 기업이나 매한가지임을 알 수 있다.

미국 최대 에너지 회사였던 엔론의 회계부정 사건은 세계 경제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사진은 2002년 엔론 사태가 터진 이후 엔론 본사에 붙어 있던 ‘팝니다(For Sale)’란 조형물. 누군가 엔론 사태를 희화화해 붙여 놓은 것이다. [중앙포토]

이 책은 엔론과 같은 대형 경제스캔들을 소개하고 있다. 제목 그대로 미국의 저명경제지인 포춘지가 자신들이 취재한 것 가운데 20개를 추린 책이다. 엔론 사건 말고도, 우리가 잘 모르는 대형 사건들도 수없이 많음을 알 수 있다. 예컨대 폰지라는 말이 있다. 다단계 판매를 통한 사기행각을 일컫는다. 1920년대 찰스 폰지가 이같은 사기를 벌였다고 해서 생겨난 단어다. 고유 명사가 보통 명사화된, 아주 유명한 스캔들이다. 하지만 이 책은 이 사건 대신 2년 전 터진 버나드 매도프 스캔들을 소개한다. 신규 고객의 돈으로 기존 고객들에게 배당을 내준, 전형적인 다단계 수법의 사기다. 문제는 그 규모가 자그마치 500억 달러에 달한다는 것이다. 학자금이나 노후자금을 몽땅 날린 사람, 기부금을 송두리채 손실 본 자선단체 등 당한 사람들이 엄청나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한 주범이었던 미국의 국영 모기지업체인 패니메이도 분식회계를 저질렀다. 2001년 이후 무려 90억 달러의 수익을 부풀렸다는 것이다. 이게 바로 당시 CEO가 6년간 1억달러 가까운 돈을 보너스로 받아간 근거이기도 했다. 특히 패니메이는 당시 자신을 개혁하겠다는 미 정부와 맞서 싸웠는데, 그 이면에는 의회와 월가의 도움이 있었다는 얘기도 소개되고 있다.

세계적인 영화사인 미국 MGM을 인수했다가 곧바로 망한 두 명의 이탈리아 사기꾼 얘기도 있다. 이들은 돈 한 푼 없는 전과자인데도 프랑스의 거대은행인 크레디 리요네로부터 20억달러의 돈을 대출받아 인수했다. 물론 그 배후에는 뇌물로 매수한 정치인과 은행가의 도움이 있었다. 금광이 없는데도 있다고 완벽하게 속여 30억달러를 먹은 사기꾼과, 미국 IBM의 최신 컴퓨터 개발 기밀을 빼내려 했던 일본 히다치의 산업 스파이 사건 등도 읽을 만하다.

물론 미국에서 배울 점도 있다. 범죄를 저지른 버나드 매도프는 50년, 엔론의 CEO 스킬링은 24년 징역형을 선고받아 지금도 복역 중이다. 불법 저지른 기업인을 풀어주기에만 바쁜 우리와는 천양지차인 듯하다.

김영욱 경제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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