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추억] 소설가·번역가·신화학자 이윤기씨 별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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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소설가이자 번역가·신화학자인 이윤기(사진)씨가 27일 오전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63세. 출판사 섬앤섬의 한희덕 대표에 따르면 고인은 25일 오전 심장에 이상 증세를 호소해 서울 강남성모병원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아왔다. 하지만, 이날 오전 갑자기 상태가 악화돼 오전 9시50분쯤 숨졌다. 고인은 최근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입원 직전까지 그리스·로마 신화를 영웅을 중심으로 새롭게 쓰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서문을 쓰는 등 마무리 단계였다. 책을 내려던 출판사 웅진지식하우스 신동해 주간은 “다른 책도 더 쓰겠다며 열정적이었는데 갑자기 돌아가셔서 당혹스럽다”고 했다. 책은 유작 출간이 될 전망이다.

이씨는 1947년 경북 군위에서 태어났다. 66년 검정고시로 대입자격을 획득하고 83년 성결교 신학대학을 중퇴하는 등 교육 과정은 굴곡이 많았다. 70년대 초반 베트남전에 참전했고 75년 청소년잡지 ‘학원’의 기자로 일했다. 76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하얀 헬리콥터’가 당선돼 등단했지만 소설로 생계가 어렵자 ‘평생의 업’인 번역으로 돌아섰다.

번역에 매진하던 80∼90년대 고인은 10년 넘게 하루 8시간 이상 원고지 100매 씩을 번역해 낸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푸코의 진자』 등이 베스트셀러가 되며 번역자로서 이름을 날렸다. 99년에는 번역 전문 연간지 미메시스 창간호가 출판사 편집자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김석희·김화영씨 등을 제치고 최고의 번역가로 꼽히기도 했다. 고인이 번역한 책은 200권이 넘는다.

고인이 대중에게 다가선 결정적인 계기는 역시 신화 저술이었다. 그리스 신화가 인류 공통의 텍스트라며 천착했다. 자신을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모노 산달로스’, 신발 한 짝을 잃어버린 사나이로 규정하고 자신의 신화 탐구를 ‘잃어버린 신발을 찾는 작업’에 빗댔다. 그리스 신화를 12개의 키워드로 풀어 쓴 2000년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는 지금까지 100만 권 넘게 팔렸다. 만화로도 출간되는 등 2000년대 중반까지 우리 사회에 신화 열풍을 불렀다.

소설집 『나비넥타이』『두물머리』, 장편 『하늘의 문』 등을 남겼고 98년 중편소설 ‘숨은 그림찾기’로 동인문학상을 수상했다. 유족으로 부인 권오순 여사, 아들 가람, 딸 다희씨가 있다. 빈소는 일원동 서울삼성병원, 발인은 29일 오전, 장례는 경기도 양평 작업실에서 수목장으로 치를 예정이다. 02-3410-6901.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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