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디지털 과부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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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애들이 사라졌다. 골목골목 메아리 치던 까르륵 천진한 웃음소리가 사라졌다. 일본 사진작가 하기노야 게이키(萩野矢慶記)가 필생의 프로젝트를 접은 건 그래서다. 동네마다 아이들이 어울려 뛰노는 도쿄의 훈훈한 정경을 일평생 카메라에 담겠다고 선언한 게 1979년. 하지만 아쉽게도 17년 만에 그 꿈을 거둬야 했다. 애들이 비디오게임과 TV에 푹 빠져 집 안에 콕 틀어박혔기 때문이다.

10여 년이 더 흐른 요즘은 컴퓨터와 인터넷·휴대전화가 아이들의 몸과 마음을 점령해버렸다. 술래잡기, 구슬치기, 땅 따먹기는 실종된 지 오래다. 이런저런 디지털 기기 앞에서 미국 초등학생들이 하루 4시간 이상을 보낸다는데 우리 애들 역시 결코 덜하지 않을 게다. 어른도 매한가지다. 영국 성인들의 경우 날마다 깨어 있는 시간의 절반(7시간5분)을 투자한단다.

디지털 세상은 아이들한테서 놀이를, 어른들에게선 기억력을 앗아갔다. 2007년 미국인 3000명을 조사해보니 30대 이하 중 3분의 1은 자기 전화번호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거의 무제한 저장되는 스마트폰까지 나온 마당이니 애써 외울 필요조차 못 느낄 터다. 어디 전화번호뿐일까. 상식일랑 구글과 위키피디아에, 길눈은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에 ‘아웃소싱’하고 아무 생각 없이 살아들 간다.

시대적 유행병이라 할 ‘디지털 치매’의 원인을 새롭게 분석한 기사가 24일자 뉴욕 타임스에 실렸다. 똑똑한 기계만 믿고 사람들이 머리를 너무 안 써서 그런 줄 알았더니 반대로 너무 많이 쓰는 게 문제란다. 온종일 e-메일과 트위터 확인하랴, 동영상 보고 게임 하랴 뇌를 혹사시켜 과부하가 걸렸단 거다. 뇌에 쉴 틈을 줘야 새로 접한 정보를 장기 기억으로 축적할 텐데 끊임없이 부려먹으니 기억은 순식간에 날아가고 학습 효과도 떨어진단 얘기다.

‘현대판 러다이트(기계 파괴) 운동’을 펼칠 수도 없고 어찌해야 할까. 아직 여름휴가가 남았다면 인터넷 접속을 끊고 대신 자연과, 사람과 접속해보자. 평상시엔 최소한 화장실에서 볼일 보는 동안만이라도 스마트폰과 결별하는 게 방법이다. ‘나이 50세도 안 돼 남들 화나게 만들 만큼 형편없는 기억력’을 과시한 총리 후보자도 귀담아듣길 바란다. 혹 계란 프라이 태운 시시콜콜한 사연까지 트위터에 올릴 만큼 디지털 기기를 과다 사용한 바람에 건망증이 온 건지 모르니 말이다.

신예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