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 푼 데다 인프라 우수 … 세계 톱10 껑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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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전 세계에서 진행된 임상시험 건수가 2007년 1만2278건에서 2008년 1만5388건으로 늘었다가 금융위기와 함께 지난해 1만5252건으로 준 것과 대비된다. 이에 따라 전 세계 임상시험 건수 순위가 껑충 뛰어올랐다. 2005년 세계 32위이던 것이 지난해 10위로 급상승한 것. 한국이 전 세계 임상시험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 또한 2005년 0.3%에서 지난해 1.5%로 뛰었다. 구미가 여전히 80% 이상 차지하는 틈바구니를 뚫고 세계 무대에 얼굴을 내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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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초 미국 시카고의 임상종양학회 총회장. 4만2000여 명의 의학자가 모인 이 국제학술대회에서 서울대병원 혈액종양내과 방영주 교수가 스타 학자로 떠올랐다. 폐암 치료 관련 신약에 대한 임상연구 보고서가 최우수 논문으로 뽑힌 것. 폐암 환자 가운데 특정 유전자 변이를 일으킨 환자들의 치료 성공률이 크게 올라갔다는 결론이었다.

방 교수의 임상시험에 참가한 일본인 폐암 환자들은 일본 병원에서 치료가 어렵게 되자 미국 하버드대 의과대학으로부터 “방 교수가 있는 한국으로 가라”는 의사 소견을 받고 한국행을 택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임상시험 비즈니스가 급격히 커지며 선진국 대열을 넘보고 있다. 특히 의료 전문인력과 시설·인프라가 뛰어나야 가능한 0상과 1상 등 초기 임상시험의 비율이 2008년 21.8%에서 올 상반기 27.2%로 높아지며 아시아의 임상시험 허브로 자리 잡고 있다. 중국과 인도는 우리와 비할 바 없는 큰 시장이지만 의료진의 수준과 인프라가 미흡하고, 일본은 관련 규제가 까다로워 임상시험 소요시간이 긴 편이다. 싱가포르는 전향적 자세지만 인구가 적어 환자 모집 면에서 불리하다.

영국의 의료전문 조사업체인 비전게인이 세계 임상시험 시장 규모를 추정한 결과 2006년 420억 달러에서 올해 610억 달러, 2015년 880억 달러로 늘어날 전망이다. 이 때문에 한국과 일본·중국 등이 치열하게 다국적 제약업체의 임상시험 유치 경쟁을 벌이고 있다.

외국 제약사들 임상시험 급증

2006년부터 보건복지부와 화이자·사노피-아벤티스·노바티스·아스트라제네카·오츠카 5개 다국적 제약사는 국내 투자와 교류를 확대하는 양해각서(MOU)를 잇따라 교환했다. 이후 이들 회사의 연도별 한국 내 임상시험은 2007년 총 135건에서 지난해엔 상반기에만 318건으로 급증했다. 올 상반기에는 MOU 체결 5개 다국적 제약사의 국내 투자 규모가 596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18% 늘었다.

미국 머크의 한국법인인 한국MSD는 올해 항암 약물 치료센터를 열었다. 전 세계 12개국에 20개의 항암센터를 연결해 머크 항암제 임상연구 네트워크를 구축했는데 한국이 여기에 포함된 것이다. 5월 말 식약청의 첫 임상시험 허가를 받아 성인 자궁경부암 환자를 상대로 1상과 2상의 임상을 진행하고 있다. 연내 2건의 임상연구를 더 할 것을 검토 중이다. 특히 항암제의 0상·1상 등 초기 임상에 적극 참여할 예정이다. 이를 통해 한국인을 포함한 아시아인에게 좀 더 효과적인 맞춤형 항암 치료제를 한국 주도로 개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서울대병원에서 정상인 자원자를 상대로 임상시험을 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2008년 이후 355건의 임상시험이 진행됐다. [GSK 제공]

서울대병원 장인진(임상약리학과) 교수는 “5년 전만 해도 다국적 제약사들의 3상과 4상 임상시험이 대부분이었으나 갈수록 초기 임상 비율이 늘고 있다”고 전했다. “실험적으로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의료 인력과 임상 인프라의 수준을 선진 제약사들이 인정한 덕분”이라는 설명이다.

실제 어떤 약물을 신약으로 개발하는 첫 임상시험 단계에서 약효를 찾아내지 못하거나 부작용을 정확하게 걸러내지 못하면 신약 개발을 중도에 포기할 수밖에 없다. 하나의 신약을 개발하는 데 10년 이상의 시간과 10억 달러 이상의 비용을 들여야 하는 제약사로서는 당연히 신중을 기해 임상센터를 선택한다.

다국적 제약사의 임상시험을 유치할 경우 거액의 임상연구비가 유입된다. 1000명 이상의 환자를 모집해야 하는 임상 3상의 경우 전 세계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수행되곤 하는데, 각국의 다국적 제약사 지역법인들은 이를 유치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지사끼리도 경쟁이 치열한 것이다. 한국에서 초기 임상이 늘어나면 3·4상에 비해 훨씬 많은 연구비를 지원받게 된다. 또한 별다른 경쟁 없이 3·4상까지 연결되는 부수 혜택까지 받는 경우가 많다.

서울대병원의 장 교수는 “한국에서 초기 임상을 진행할 경우 연구 결과의 수준은 비슷하면서 비용은 미국·유럽의 5분의 1 정도라 해외 제약사들이 더욱 선호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정부·병원, 인프라 확충에 분주

우리 정부도 임상시험 시장의 가능성을 크게 본다. 2005년부터 지난해까지 5년간 900억원 규모의 재정을 투입해 서울대병원과 서울아산병원 등 15개 임상시험 센터를 육성했다. 경제적 파급효과는 투입된 예산의 50배가량인 4조2000억원에 달할 것으로 정부는 추정한다. 전문인력 고용창출은 물론 임상시험 관련 기술 개발, 학술 저술 및 논문, 특허건수 증가 등을 두루 따진 것이다.

식약청은 글로벌 임상국가 도약을 위한 정책을 마련해 추진 중이다. 국내 임상시험의 국제 경쟁력 지표가 되는 초기 임상의 사전 상담 소요기간을 기존 50일에서 24일로 절반 이하로 단축하는 개정안을 마련했다.

신약 개발 과정을 단축할 수 있는 임상 데이터의 표준화 작업도 한창이다. 지난달 임상 데이터의 표준을 제정하는 국제비영리기구 CDISC의 한국 사무소 K3C가 설립된 것도 이 때문이다.

김석일(가톨릭대 의과대 교수, 예방의학교실) K3C 회장은 “미국에서도 신약 허가를 받는 기간과 비용을 줄이기 위해 식품의약국(FDA)에 임상 자료를 제출할 때 CDISC 표준을 사용한다. 국내 식약청에서도 국제 표준에 따라 임상 데이터를 관리하면 내용 파악은 물론 자료 보관이나 검색이 훨씬 간편해진다”고 설명했다.

임상 데이터 처리의 앞선 솔루션을 가진 정보기술(IT) 업체들도 한국 시장에 눈독을 들인다. 미국의 비즈니스 분석 소프트웨어 업체인 새스(SAS)는 최근 임상 데이터 통합 및 신약 개발 솔루션을 국내에 출시했다. SAS는 CDISC 회원사로 활동하면서 세계적으로 가장 자주 쓰이는 분석 솔루션을 보유하고 있다. SAS코리아의 윤희창 팀장은 “일본의 다이이치산쿄는 SAS의 솔루션을 활용해 연 600만 달러가량의 비용을 절감한다”고 말했다. 임상연구 초기에 구현된 CDISC 표준은 연구 개시 단계에 소요되는 시간과 비용을 70∼90% 절감해준다는 보고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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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우 기자

◆임상(臨床)시험(Clinical test)=제약회사 신약 개발의 필수 과정. 특정 물질이 개·토끼 등을 이용한 동물실험에서 약효가 입증되면 정부기관의 허가를 받아 사람에게 약물을 투여해 약효를 검증하는 절차다. 임상시험 직전에 특별시험으로서, 극히 일부 환자에게 소량의 약물을 투여하는 0상 임상시험을 하기도 한다. 흔히 말하는 임상시험은 통상 20∼30명의 정상인 자원자를 상대로 안전성과 투약량을 측정하는 1상, 100∼300명의 환자 자원자를 상대로 약효와 부작용을 확인하는 2상, 1000∼5000명의 환자 자원자를 상대로 약효를 재확인하고 장기적인 안전성을 따지는 3상 순으로 진행된다. 신약 시판 이후에는 새로운 약효가 없는지, 부작용이 더 생기지는 않는지 조사하는 4상 시험을 하기도 한다. 임상 소요기간이나 비용은 치료 대상 질병이나 화합물의 구조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다만 1상부터 3상까지 평균 6년 걸리고, 2억6000만 달러(약 3120억원)가 든다는 추정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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