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탓이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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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이번 선거를 얘기할 때 제일 많이 거론되는 것이 인터넷이다. 투표 당일 오후 인터넷에 사발통문이 돌아 젊은층이 대거 몰려들어 승패가 역전됐다고 한다. 월드컵 응원에서부터 촛불시위, 그리고 노무현 바람이 인터넷 때문이라고 한다. 세대간의 대결양상을 띤 이번 선거에서 50대 이상이 패배한 이유도 인터넷을 몰라서 당했다고도 한다. 사실 한나라당도, 민주당도 모두 인터넷의 중요성을 알고 선거운동의 큰 비중을 두었다. 그런데 왜 인터넷이 노무현 후보 쪽에만 유리하게 작용했을까. 인터넷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중립적인 도구에 불과하다. 따라서 인터넷 자체에 의미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그릇에 담아낸 메시지가 무엇이었느냐가 더 중요하다. 거기에 노무현의 인터넷바람의 실체가 있는 것이다.

노무현의 메시지는 변화였다. 잘 사는 사람들, 지위가 높은 분들, 이 사회를 끌고 왔던 어른들, 교육을 잘 받은 엘리트들이 중심무대를 차지했던 이 세상을 바꾸자는 것이 메시지였다. 그 자신 삶의 역정이 하나의 상징이었다. 인터넷은 이 메시지의 전달통로에 불과했다. 인터넷 상에는 수천가지의 메시지가 넘쳐난다. 그 가운데 유독 盧후보의 메시지만이 투표라는 행동으로 전환될 수 있었던 것은 그 메시지를 수용할 토양이 벌써 충분하게 배양돼 있었기 때문이다.

득표결과를 본다면 노무현 당선자를 포함해 민주사회당 등 진보좌파 성향의 표가 우리 유권자의 절반이 넘었다. 보수진영의 표보다 더 많아졌다. 서울을 보라. 소득이 가장 높은 강남·서초구 두곳만 한나라당을 더 많이 지지했을 뿐이다. 이 두 지역은 마치 서울 속의 섬처럼 외롭게 고립돼 있었다. 이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한국 기득권층의 고립을 상징해 주는 것 아닌가. 왜 이 같은 사태가 오게 되었는가?

50,60대의 부모가 20,30대의 자식을 설득하지 못했다는 얘기는 기성세대의 생각, 논리를 젊은 세대가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눈에 부모의 세대가 잘못된 세대로 보였기 때문에 부모 말을 승복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 사회를 지탱해 온 보수주의의 윤리와 연관돼 있다. 쉽게 얘기해 보자. 올해 아파트 파동에서 강남 집값이 천정부지로 올라갔을 때 가장 좋아했던 사람은 돈 많은 강남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웃고 있을 때 다른 지역 사람들은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더구나 50%가 넘는 집 없는 사람들의 가슴은 어떻게 무너졌겠는가. 그것이 사실은 DJ정부의 실패한 주택정책의 결과였지만 보통사람들의 마음에는 가진 사람에 대한 미움으로 남는 것이다. 여유있는 사람이 더 가지려 한다고 보일 때, 병역파동이 보여주었듯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 누리는 만큼 공동체에 대한 의무를 다하지 않고 있다고 비쳐질 때 보통 사람들의 마음에 싹트는 것은 무엇인가.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 아닐까.

우리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틀을 지키며 살아왔다. 자유와 평등, 개인과 전체라는 대립된 가치 중에 자유와 개인의 소중함에 더 가치를 두며 살아왔다. 그러나 이번 선거결과는 평등쪽으로 무게가 옮겨간 것이며, 전체가 중시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더 컸다고 얘기할 수 있다. 해방 후 50여년 지배이념에 변화가 온 것이다. 그 원인은 인터넷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기득권층, 보수층의 자만의 결과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들은 경쟁에서 승리한 대가를 대를 이어 누리기에만 관심이 있을 뿐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눈물은 부족했다.

역사는 자유와 개인이라는 가치가 더 소중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한 사회가 평등과 전체라는 가치를 추구해 갈 때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는 공산주의가 잘 말해주고 있다. 이 상반된 가치는 동전의 양면 같아서 한쪽의 가치를 잘 지켜가려면 다른 쪽의 가치에도 세심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름 아래 개인이익의 극대화만을 추구하고, 시장경제라는 이름 아래 경쟁에서의 승리만을 찬양하는 바로 그때, 자유와 개인은 평등과 전체라는 명분 앞에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이번 선거로 한국 보수주의는 전환점에 왔다. 눈물 없는 보수주의, 공동체에 대한 책임의식 없는 보수주의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됐다. 이것이 이번 선거가 준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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