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국 고립화 성공한 적 없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북한 핵 위기가 한 단계씩 올라가면서 한·미 공조에 빨간불이 켜지는 분위기다. 미국이 북한의 핵문제 해결을 위해 봉쇄 검토에 들어가자 김대중(金大中)대통령과 노무현(盧武鉉)대통령당선자가 한 목소리로 제동을 걸고 나섰기 때문이다.

지난 10월 북한의 새 핵개발 계획이 불거진 이래 한·미·일 3국 정상이 합의한 북핵 공조 원칙이 북·미 간 정면 충돌 양상이 벌어지면서 중대 시험대에 오른 것이다. 북한이 핵문제에 관한 민족 공조를 들고나온 상황에서 한·미 간 불협화음 조짐마저 보이면서 북한 핵문제는 물론 한·미 관계 자체에도 새 국면을 맞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핵 문제 해결 한국 주도 의지도=金대통령이나 盧당선자가 30일 "북한 핵문제가 평화적으로 해결돼야 한다"고 한 것은 미국의 대북 봉쇄 움직임을 겨냥했다는 풀이다. 미국이 아직 우리 정부에 대북 봉쇄 방침을 공식 통보하지 않은 만큼 실제 그 쪽으로 가지 않도록 차단망을 치려는 것으로 보인다. 金대통령이 대북 봉쇄 효과에 대해 공개적으로 강한 의문을 나타낸 것은 이와 맞물려 있다. "공산국가에 대한 억압과 고립화가 성공한 일이 없다"고 잘라 말한 것이다. 金대통령이 북한 핵문제가 불거진 이래 이처럼 일도양단(一刀兩斷)식의 얘기를 한 적은 없었다. 金대통령이 "우리는 북한과 전쟁할 수 없다. 한반도는 우리가 사는 곳이며, 우리의 생명이 걸려 있다"고 한 것은 전쟁을 부를지도 모를 미국의 봉쇄정책에는 동참하지 않겠다는 메시지도 담겨 있다는 분석이다.

盧당선자도 마찬가지의 논리를 폈다. "북한의 태도에 대해 대화 중단이나 지원 중단 등의 강경 조치를 취할 때는 전면전 시나리오를 생각하고 검토해야 한다"며 신중한 대응을 주문했다. 盧당선자의 이 발언은 "북한에 대한 나의 입장은 미국 강경파의 입장과 다를 수 있다"고 한 외지(外紙)와의 인터뷰 내용의 연장선상에 있다.

金대통령·盧당선자의 이 같은 발언에는 북한 핵문제에 대한 당사자주의를 견지하겠다는 의지도 묻어난다. 한국이 전면에 나서 북한 핵문제를 주도적으로 풀어나가겠다는 의사 표시라는 것이다. 실제 정부는 미·일과의 협의 외에 중국과 러시아를 상대로 한 대북 설득 외교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1993∼94년 핵위기 당시 한국이 북·미 간 협상에서 뒷전으로 밀려나 제 역할을 하지 못한 점을 金대통령과 盧당선자 모두 고려했을 수도 있다. 金대통령과 盧당선자는 지난 23일 대선 후 처음으로 만나 향후 시나리오와 대응방안을 깊숙이 협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탈퇴하고 핵개발 쪽으로 나아가면 자칫 우리 정부는 딜레마에 빠질 수도 있다.

◇미국의 대북 봉쇄 개시는 미지수=金대통령·盧당선자의 이 같은 인식에 따라 미국이 실제 대북 봉쇄에 나서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미국이 동맹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방적으로 밀어붙일 가능성은 작기 때문이다. 미국 내에서도 휴전선 쪽에 몰려 있는 북한의 재래식 전력을 들어 대북 봉쇄에 회의적인 시각도 있다. 게다가 미국은 대이라크 개전에 외교·군사력을 집중하고 있는 판이다.

그러나 북한 핵문제 해법을 둘러싼 한·미 간 불협화음은 장기적으로 한·미 관계에 큰 손상을 줄 수 있다. 9·11테러 이후 대량살상무기 확산 방지를 제1의 국가전략으로 삼고 있는 미국은 한·미 동맹이 거꾸로 이 전략에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할지도 모른다. 가뜩이나 한국 내 반미 기류가 강하고, 미국에서도 "북한 폭격을 위해서는 주한미군을 철수해야 한다"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다.

한·미 간 갈등이 커지면 한국 내 남남 갈등이 불거질 소지도 있다. 보수파들이 정부의 한·미 관계 및 대북 인식에 반발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한·미 간 갈등은 북한 핵위기의 체감지수를 높여 경제에도 악영향을 줄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오영환 기자

hwasan@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