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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려… 우리 집안 다 깡패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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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면

지난해 영화 '친구'는 "내가 니 시다바리가?" "고마해라, 많이 무따아이가" 등을 유행시켰다. 올해엔 이에 견줄 만한 폭발력 넘친 대사는 찾기 힘들었다. 대작(블록버스터)의 침몰이 가장 큰 원인이다. 하지만 급변하는 한국 사회를 반영하는 대사는 많은 편이었다. 중앙일보 영화팀이 올해 회자했던 한국영화 속의 대사를 개봉 순으로 간추렸다. 그 때 그 장면을 다시 떠올리며… .

▷"깡패 새끼가 무슨 사랑이야."(나쁜 남자)-영화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던 뒷골목 깡패 한기(조재현)가 막판에 내뱉은 단 한마디. 한기의 귀곡성 같은 이 말은 영화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이 됐다. 가슴 속에 켜켜이 쌓아왔던 여대생 선화(서원)에 대한 한스러운 사랑의 폭발. 하지만 이 영화는 여성 관객에겐 박한 점수를 받았다.

▷"Can You Speak English?"(생활의 발견)-유부녀 선영(추상미)의 집밖에서 기웃거리던 무명 배우 경수(김상경)가 선영의 남편과 마주치자 엉겁결에 '썰렁한' 영어를 던지고 뒷걸음으로 도망쳤다. 아무리 위기 탈출용이라지만 엉뚱함의 극치 같다. 홍상수 감독의 재치인가, 아니면 위악인가. 하여튼 기막한 상황 반전.

▷"너, 착한 놈인 것 안다, 그러니까 나 너 죽이는 것 이해하지, 그렇지."(복수는 나의 것)-딸을 유괴·살해당한 평범한 가장 동진(송강호)이 누나 수술비를 마련코자 납치극을 벌인 청각장애인 류(신하균)를 응징하며 곱씹은 말. 박찬욱 감독의 피도 눈물도 없는 비정한 세계관.

▷"프라이드라고 했잖아 프라이드. 이걸 누가 물에 빠뜨리래."(집으로…)-켄터키 치킨을 먹고 싶다고 보채는 외손자 상우(유승호)에게 할머니(김을분)는 손수 닭을 잡아 백숙을 만들어 '바친다'. 하지만 하얀 닭다리를 보고 기겁하며 울음을 터뜨리는 손자. 이정향 감독은 세대·도농 간 문화차를 이 유머스러운 한장면 안에 녹여냈다.

▷"나, 자신 있어. 절대로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어."(결혼은 미친 짓이다)-"네가 결혼한다면 일종의 범죄다"고 빈정대는 바람둥이 준영(감우성)을 향한 당돌한 여성 연희(엄정화)의 멋진 반격. 결국 연희는 결혼 후에도 멋진 이중 생활을 한다. 급변하는 한국 사회의 결혼 풍속도다. 시인 출신의 유하 감독 충무로 연착륙.

▷"정말 달라지고 싶다, 항상 달라져야 한다는 생각에 피가 끓는다."(취화선)-조선 후기의 천재 화가 장승업(최민식)의 부단한 자기 정진. 신분·시대의 한계를 뛰어넘는 예술을 지향한다. 임권택 감독의 독백처럼 들린다. 공맹(孔孟)을 팔아 세상을 속이려고 하는 사이비 지식인에 대한 예술가의 일침,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가,가,가…,치… 자… 요…. 여…,자…,가…, 가…,치…,자,자,고… 하…,하는 게…, 무슨,소린지…,몰라요?"(오아시스)-이보다 더 절박한 사랑 고백이 있을까. 뇌성마비 장애인 공주(문소리)가 사회 부적응자 종두(설경구)를 드디어 수용한다. 대사 이상으로 온몸이 조여온다. 곱고 예쁘진 않지만, 처철하고 아름다운 이창동 감독의 세상 보기.

▷"그려,우리 집안 다 깡패여, 그랑께, 좋게 얘기할 때, ○○○ 닥쳐라,잉."(가문의 영광)-올해 조폭 코미디의 정상에 올랐던 진경(김정은)의 표변한 모습. 얌전만 떨던 진경은 자기 집안을 무시하는 연인 대서(정준호)의 옛 여인에게 전라도 사투리로 공격한다. 그리곤 금세 요조숙녀로 돌아간다. 김정은의 개인기와 정흥순 감독의 재치가 만났다.

▷"라이터 사세요, 라이터."(성냥팔이 소녀의 재림)-TTL 소녀 임은경이 스크린에 입문해 라이터 소녀로 변신했다. 그의 신비한 이미지를 차용한 영화는 불쌍한 소녀에 무관심한 세상에 기관총을 난사했다. 하지만 대사발이 약했던 것일까, 흥행에선 참패했다. 동양 사상을 SF에 접목하려 했던 장선우 감독의 좌절된 의욕.

▷"나, 너 사랑해도 되니."(로드 무비)-지난해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를 회자시켰던 '봄날은 간다'의 대구쯤 될까. 이성이 아닌 동성 간 대화라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어두컴컴한 소금창고 안에서 죽음을 앞둔 동성애자 대식(황정민)이 인생 실패자 석원(정찬)에게 절규하듯 꺼낸 말. 김인식 감독의 묵직한 영상미.

▷"넘어가네, 넘어가네. 아이고, 나 죽네."(죽어도 좋아)-이만한 사랑 표현이 있을까. 있는 그대로 튀어나오는 육감의 언어? 7분간의 격정 끝에 터져나온 진솔한 발언이다. 그런데 7순의 할아버지 박치규옹은 이 대사로 제한상영가 논란에 휘말렸다. 방송사 PD 출신인 박진표 감독의 리얼리즘 찬가.

박정호 기자

jhlogos@

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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