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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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꼭 10년 전 이맘때 김영삼 대통령 당선자는 노태우 정부로부터 정권 인수에 착수했다. 대통령취임준비위원회의 한 실세는 차기 정부의 절대 과제가 '변화와 개혁'인 만큼 이를 주도할 참신한 인물의 대폭 기용이 예상된다고 설명했다. 김영삼 정부에 무슨 변화와 개혁이 있었느냐고 지금 되물으면 대답이 궁하지만 당시는 사정이 달랐다. 군사 정권으로부터 30년 만에 권력을 회수한 '문민 정부' 출범만으로도 변화와 개혁의 깃발을 휘두를 만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때 벌써 개혁이 새 정권의 단골 메뉴로 올랐다는 사실이 놀랍다.

개혁은 그 어감이 신선하다. 그러나 모두가―특히 정치인들이―개혁을 외치는 바람에 아주 식상한 말이 돼버렸다. 색깔 안경을 벗는다면 개혁은 보수보다 우월한 가치이기도 하다. 보수(保守)를 보수(補修)하기 위해서도 개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 정치에 하릴없이 들이대는 개혁과 보수의 도식적 잣대를 마땅찮게 생각한다. 굳이 개혁이니 보수니를 따질 일이 아닌데도 '한국적' 정치 현실이 그렇게 가르기 때문이다. 아무튼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는 개혁의 기치를 들고 나와 선거에서 이겼다. 그러나 그를 열광적으로 지지했다는 소위 2030세대한테서 풍기는 개혁의 의미에는 의문이 많다.

그것은 아주 초보적이지만 본질적인 질문이다. 개혁 대상과 대안을 확실히 정하고 개혁을 내세운 것인지, 아니면 기득권 층과 기성 세대에 대한 반발 정서로―한나라당이 싫고 그 후보가 늙어서―반개혁으로 몰아간 것인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행여 후자가 답이라면 盧후보의 승리는 득표에서의 승리이지 개혁의 승리는 아니다. 붉은 악마든, 촛불 시위대든, 노사모든 모두 새로운 사회 현상임에는 틀림없으나 그것이 과연 개혁 욕구의 표출인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나는 노무현 정부가 진정으로 개혁 정부이기를 기대한다. 그것이 또 나만의 기대는 아니니, 민주노동당 후보를 찍고 싶었지만 선두 주자들의 지지율 차이가 박빙이라는 바람에 盧후보에게 표를 모아주었다는 젊은 세대의 '투표 비밀'을 주위에서 여러 차례 주워들었기 때문이다.

꼭 5년 전 이맘때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는 김영삼 정부와 정권 인수를 협의했다. 국제통화기금 탁치라는 급박한 사정도 있었지만,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국정의 일부를 미리 인수했다. 그리고 '준비된 대통령' 당선자답게 정부조직개편위원회를 출범시켜 정부 기구를 수술하려고 했다. 그러나 수술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효율 향상을 빌미로 없애려던 부서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살아나기도 했는데, 일례로 살생부에 올랐던 해양수산부는 그것을 만든 김영삼 대통령의 '특청'으로 겨우 살아남았다. 그 덕에 노무현 해양수산부 장관이 각료 실습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음해의 제2차 개편에서는 정부 조직이 오히려 불어남으로써 '작은 정부' 약속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국민의 정부' 화두는 단연 개혁이었고, 개혁 논란 속에 임기를 마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혁 피로증이라는 신종 유행어가 생길 만큼 개혁 외침이 난무했지만 정작 이뤄진 것은 별로 없었다. 현 정권이 꼭 필요한 개혁만 최소의 비용으로 묵묵히 밀고 나갔던들 대통령 선거 쟁점으로 개혁이 다시 나오지 않고, 민주당의―김대중 정권의―승리 아닌 노무현의 승리라는 반성과 야유도 터지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이 개혁 포퓰리즘의 실패가 차기 정부의 '반면교사'가 되기 바란다. 요컨대 공약으로 내건 개혁은 집요하게 추진하되 그 방법만은 크게 요란하지 않으면 좋겠다.

김영삼 정부는 '멀쩡하던' 제7차 5개년 계획을 돌연히 중단했다. 그 대신 신경제 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신경제 1백일 실전까지 돌입했다. 앞으로 5년은 초장 1백일 동안에 결정된다는 조바심 때문이었으나, 기고만장한 신경제 목표 달성은 고사하고 국제통화기금 관리라는 처참한 몰골로 정권을 인계해야 했다. 김대중 정부의 치적에서 가장 성공한 부분은 내 개인 생각이지만 개혁의 기역자도 들먹이지 않은 햇볕 정책이었다. 되도록 개혁 시비를 피하면서 반세기의 냉전 구도 일각을 녹이는 그 변화보다 더한 개혁을 지난 5년 집권 중에 달리 찾기 어렵다. 개혁 깃발을 앞세운 진군 나팔 없이도 진짜 개혁을 이뤄내는 허허실실(虛虛實實)의 지혜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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