뱃길 인생 50년 '제주 해운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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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5면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제주도. 별다른 공장도 없고 척박한 농토와 바다만을 일궜던 제주 사람들은 어떻게 생필품을 조달했을까.

㈜대양해운의 고유진(高有珍·74·사진)회장은 55년간 연탄이며 쌀 등 생필품들을 실어 나르며 제주 근대화의 꿈을 실현한 기업인이다.

㈜대양해운은 "대기업 계열사를 제외한다면 국내 연안 화물운송업계의 선두주자"라고 高회장은 말했다.

그는 일제 시대 16세때 단신으로 일본에 건너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간사이(關西)공업학교를 다니며 세상을 배웠다. 그리고 1944년 해방을 앞두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48년 4·3사건이 터지면서 그는 부모의 손에 이끌려 당시 제주와 내륙간 잡화물을 실어나르던 '사쿠라마루'(櫻丸·70t)에 몸을 실었다. 이른바 '시다'격인 견습 선원생활이었다.

高회장은 "고생되긴 했지만 그 때 불현듯 이게 사업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 생각은 20대 초반에 불과하던 그가 화물운반선의 선주가 되도록 만들었다. 말이 선주지 24명의 선원들과 함께 자본을 투자한 목선의 '대표'선원이었다. 당시로선 '벤처'정신이었다.

내친 김에 그는 23세의 나이로 국내 화물선업계에서 흔치 않은 청년선장으로 나섰다. 지분을 불려나가던 그는 6척의 목선을 확보하고 68년 ㈜대양해운을 창업했다. 하지만 그의 항로가 순탄한 것만도 아니다. 77년 제주∼부산간 카페리선이 취항하면서 화물 운송량이 급감, 회사 경영은 타격을 입었다.

게다가 행정기관에 의해 떠안은 '연탄수송'전문 선박운영과 연탄업체 창립은 80년대 후반으로 넘어가면서 회사의 '골칫덩이'가 됐다.

高회장은 새로운 곳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그는 '신제주'개발을 비롯, 제주의 개발 붐을 일찌감치 예상한 듯 78년 국내 최초의 모래채취 운반선을 도입했다. 4백90t급의 '제2금영호'는 자체 탐사장비까지 갖춰 직접 전남 진도 앞바다의 모래자원을 확인, 5곳의 광업 채굴권까지 얻어냈다. 지금껏 제주 모래시장의 65%를 대양해운이 공급할 수 있도록 만든 밑거름이다.

그는 지난 90년 국내 처음으로 일반화물선에 선박용 크레인을 설치, 하역작업 자동화를 이뤄냈다. 98년 전남 광양항 컨테이너 부두 건설공사와 부산 가덕도 신항만방파제 축조공사 등에 모래공급 계약을 체결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투자 덕이다. 이제 그는 ㈜대양해운을 주력기업으로, ㈜대양운수·㈜제주레미콘 등 3개의 계열사에 1백23명의 임직원을 거느리고 있고 올 1백50억원의 매출액을 내다보고 있다.

그는 올 연초 자식들에게 실무경영을 맡기고, 젊어서부터 푹 빠진 난(蘭)전시장 만들기에 매달리고 있다. 그는 내년 중 제주 시내에 2만여 그루의 난을 갖춘 전시장을 열 계획이다. 高회장은 요즘 자식들에게 "아장(앉아서)구경만 하지 말고 돌아다녀라"라며 현장경영을 강조하고 있다.

제주=양성철 기자

ygodot@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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