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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85>제104화두더지人生...발굴40년: 40.'보릿고개 발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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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발굴대원의 숙소로 정한 양계장은 수백 마리가 넘는 닭들로 가득 차 있었다. 하루종일 귀가 멍멍하도록 울어대는 닭소리는 고사하고 온통 난무하는 닭털들로 견딜 수 없을 정도였다. 주인이 닭인 집에 얹혀 사는 사람 신세가 실감났다.

뿐만 아니라 비좁은 방에 성인 대여섯명이 포개져 자다 보니 머리를 서로 반대방향으로 해서 숨통을 트지 않으면 도저히 한 방에 누울 수 없었다. 늦가을이어서 그나마 다행이었지 여름이었으면 진동하는 발냄새 등 각종 체취 때문에 숨이 막혔을 것이다. 근처에 목욕탕이 있을 리 없어 모든 대원이 씻지 못했던 것이다.

당시 국립박물관의 윤무병(尹武炳) 수석학예관과 지금은 고인이 된 한병삼(韓炳三) 학예관 두 분은 몸집이 보통사람보다 큰 편이었다. 잠자리가 더 비좁았던 것은 물론이고 까마득한 상관들이었기 때문에 졸개로서는 숙식을 함께 하기가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음식도 잠자리 이상으로 보잘것 없었다. 겨우 밥 한 그릇에 소금국과 김치 정도가 식단의 전부였다. 어쩌다가 큰 마음 먹고 양계장의 달걀 하나라도 축내면 어김없이 식비에 계산됐다. 발굴조사비가 턱없이 부족하다 보니 달걀 한개 값에도 벌벌 떨 수밖에 없었다.

당시 암사동 선사유적 발굴은 시내 출장으로 분류돼 숙박비는 고사하고 일일 비용조차 계산되지 않았다. 현장에 나가 발굴했지만 비용 계산에서는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암사동이 강동구에 포함되지 않고 경기도 광주군에 포함되었더라면 시외 출장비를 받았을테니 숙식 문제가 조금 나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사무실에서 현장까지 출퇴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오전 내내 걸려 현장에 도착, 도시락으로 점심을 때우고 두시간 정도 작업하고는 바로 퇴근을 서둘러야 해가 지기 전에 사무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결국 궁핍한 예산에서 오는 불편을 몸으로 때울 수밖에 없었다.

유적발굴은 악조건이었지만 발굴대원들은 우리나라의 선사문화를 구명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조사에 임했다. 요즘 나와 당시 동료들은 당시 열악했던 발굴 환경을 가리켜 보릿고개 발굴이었다는 말을 가끔 하곤 한다. 보릿고개를 직접 체험한 50대 이상에게는 그 의미가 직접적으로 전달되겠지만 '그런 시절이 있었지'라는 정도로만 알고 있는 독자들 대부분은 제대로 그 말이 전달하는 의미가 실감나지 않을 것이다.

아시다시피 보릿고개는 가난했던 시절을 얘기하는 대명사다. 봄에 보리를 수확하기 전 먹을 것이 없어 고생했던 춘궁기(春窮期)에 얽힌 애환들은 구구절절하다. 보리가 여물 때까지 참지 못하고 익지도 않은 풋보리를 베어먹기도 했을 만큼 가난한 적이 있었다. 나무 뿌리를 캐먹으며 힘든 고개를 넘겨야 보리밥을 먹을 수 있었다.

지금은 사전에서나 찾아봐야 하는 옛말이 됐지만 불과 30년 전만 해도 우리의 농촌사정은 보릿고개를 해마다 겪어야 했다. 그만큼 나라 전체의 경제사정이 어려웠다. 요즘 세대들은 "보리가 없으면 라면을 끓여 먹으면 되지 무슨 말씀이냐"고 반문한다. 할 말이 없다.

악조건이었지만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됐고 나는 선사 주거지발굴(先史 住居址發掘)의 노하우를 하나 하나 배워나갔다. 날씨가 추운지 더운지도 모르고 하루종일 땅과 씨름했다. 암사동 발굴을 통해 모래땅에서 발굴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작업인지를 실감하게 됐다.

선사인(先史人)들이 살았던 움집(竪穴住居) 터를 찾는 데는 세심한 발굴기술이 필요했다. 움집이 남긴 흔적을 통해 윤곽을 찾아야 하는데 모랫바닥에서 흔적을 찾기란 보통 어려운 작업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땅의 색깔, 즉 토층(土層)의 변화를 읽을 줄 알아야 한다. 흙의 색깔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하는데, 토층의 색깔을 구분하고 다른 색깔이 뒤섞여 교란된 것을 판별해 낼 수 있는 안목(眼目)이 없으면 주거지 발굴조사는 불가능하다.

유물이나 토기편이 보여 고구마나 감자 캐내듯 유물만 건져 낸다면 그런 작업은 도굴과 다를 게 없다. 토층과의 연관 속에서 당시의 생활상을 파악할 단서를 찾지 못한다면, 단순히 캐낸 유물들은 학술적인 가치를 갖지 못하는 것이다.

정리=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조유전<고고학자.前 국립문화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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