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에 간직한 첫사랑의 미련, 판타지 세계로 떠나는 지적 모험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80호 04면

일본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3권이 출간된 지난 4월 19일, 개점시간을 두어 시간 앞당기기로 한 서점 앞에는 이른 아침부터 수십 명의 독자가 줄을 서서 개점을 기다리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출간 12일 만에 판매량 100만 부를 가볍게 넘어선 이 소설은 우리나라에서도 번역본이 출간(7월 28일)되기 전인 7월 9일 실시한 예약판매부터 판매 순위 1위에 등극해 현재까지 진행 중이다.

이성과 감성의 짜릿한 유희- 무라카미 하루키 『1Q84』를 읽는다는 것

40개 국어로 번역되었다는 하루키의 ‘1Q84 신드롬’은 어디서 비롯된 걸까? 하루키는 워낙 잘 팔리는 작가인 데다 전작들에서 인정받은 특유의 스타일에 대한 팬들의 충성이 대단한 점도 있지만, 이 두껍고도 비싼 책이 기존의 매니어를 넘어 이제 막 성인이 된 20대부터 중장년까지 폭넓은 독자층에 열렬히 소비되는 현상은 하루키 일반론보다는 작품 내부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할 것 같다.

유년시절 첫사랑에 대한 애틋한 느낌만을 간직한 채 20년 동안 한 번도 만나지 못하면서도 서로를 그리워하면서 각자 건조한 일상을 살아가던 아오마메와 덴고. 우연하게 미지의 신화 ‘리틀피플’이 인간을 통제하는 판타지의 세상으로 흘러들어가 예기치 않은 사건에 휘말리게 되고, 3권에서는 ‘리틀피플’의 소리에 정신을 지배당한 시스템의 집요한 추적을 피해 마침내 재회하게 된 이들이 현실세계로 돌아와 첫사랑을 이룸으로써 기나긴 이야기가 완결된다.

하루키가 요미우리신문과의 인터뷰에서 “ 만나 뿔뿔이 헤어진 30세의 남녀가 서로를 깊이 바라보는 단순한 이야기를 가능한 한 길게 복잡하게 써보자”는 구상에서 이 소설이 비롯되었다고 밝혔듯, 이것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간직한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세상에는 불륜·삼각관계 등 온갖 종류의 사랑 형태가 있고, 타인의 사랑방식에 공감이 가기도 하고 안 가기도 하지만, 유년시절 첫사랑의 그 알 듯 말 듯한 설렘만큼은 모든 사랑의 공통분모 같은 것이 아닐까. 대부분의 사람은 열 살 즈음에 처음으로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성인이 될 무렵까지 그 감정을 소중한 기억으로 간직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 혼자만의 가슴앓이에 그칠 뿐 성인이 되어 현실적인 사랑에 적응하면서 그 기억은 희미해진다.

그러나 ‘어린 시절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적도 없는 두 사람이 똑같이 단 한 번도 서로를 감정적으로 배신하지 않고 20년 동안이나 첫사랑을 간직해왔다’는 『1Q84』의 극도로 로맨틱한 설정 앞에, 많은 이들은 가슴 한쪽에 묻었을 뿐 결코 잊지는 않았던 첫사랑에 대한 감정을 들춰보며 뜨거운 지지를 보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보편적인 사람들의 마음을 적시는 첫사랑에 관한 스토리를 어딘지 낯선 세계와의 충돌과 모험을 통해 풀어나갔다는 점에서 독자의 가슴은 더욱 뛰게 된다. 하루키가 안내하는 어딘지 모를 환상세계 속으로 여행을 떠나는 설렘이 책을 읽는 내내 지속되는 것이다.

추리소설을 방불케 하는 긴박한 전개와 특유의 세련된 문장도 힘을 발휘한다. 한 일본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현실세계의 ‘지금 여기’를 잊고, 기다리고 기다렸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새로운 이야기 세계에 몰입하고 있다. ‘하루키적’이라고 형용할 수밖에 없는 매력적인 비유들, 사용되는 개개 표현의 적확함과 그 울림,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의 연결을 포함해 어떤 세부도 소홀함 없이 철저히 고려되고 조탁(彫琢)된 음악적 문장. 책장을 넘기면서 영혼의 문이 똑똑 두드려지는 것을 느낄 것이다. 문을 연다. 그러면 마음의 안쪽인지 바깥쪽인지 알 수 없는 그곳에는 당신의 것이며 또한 누구나의 것이기도 한 광경이 펼쳐져 있다. 이 지극히 친밀하면서도 어딘지 먼 보편적인 풍경을 만나는 것, 또는 그것을 떠올리는 것.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는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오노 마사쓰구·小野正嗣)

하루키가 안내하는 판타지의 세계는 독자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요소들로 가득하다. 달이 두 개 뜨는 ‘1Q84’의 세계는 무얼 의미하며 ‘리틀피플’의 정체는 도대체 뭘까? 소설 가득 넘치는 은유와 상징에 가려진 수수께끼들은 어떻게 풀어야 할까?
여러 인터뷰에서 밝혔듯 하루키는 거대한 시스템과 개인의 정신의 대립을 작품의 가장 중요한 테마로 삼아왔다. 『1Q84』는 사랑 이야기를 판타지라는 양식을 통해 ‘인간 사상을 속박하는 거대 시스템에 대한 저항의 메시지’라는 배경 속에 녹여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1Q84』란 조지 오웰의 ‘1984’적인 사상통제의 공포에 대한 알레고리다. 일본의 1980년대는 격렬한 이념대립 끝에 마르크시즘이라는 대항가치가 생명력을 잃은 뒤 무엇을 정신적 지주로 삼아야 할지 알지 못하게 된 혼돈의 상태에서, 마르크시즘을 대체하는 좌표로 컬트 종교가 득세한 시대였다. 게다가 우연하게 1984년은 옴진리교가 처음 도장을 연 해이기도 하다. 컬트 종교에 사상을 통제당한 개인이 95년의 지하철 가스테러와 같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 엄청난 살상을 행하고 자신조차 구제받을 수 없는 형편에 놓이게 된 현실에서 하루키는 시스템과 인간 영혼의 안타까운 모순을 본 것이다.

1Q84년을 지배하는 신화적 아이콘 ‘리틀피플’의 ‘소리’에 정신을 지배당한 ‘선구’의 멤버들 역시 깨닫지 못하는 가운데 인간성을 상실하고 구제불능의 상태에 놓여 있다. 그러나 후카에리의 소설 ‘공기번데기’가 리틀피플이 더 이상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할 수 있었듯, 하루키는 집단적 무의식에 아로새겨진 사상통제의 시스템에 대항하는 힘있는 이야기를 만들고자 한 것이다. 그는 그것이 작가의 역할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좋은 이야기는 사람의 마음을 깊고 넓게 하고, 깊고 넓은 마음은 좁은 곳에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2008.5.12 마이니치신문 인터뷰 중)

로맨틱한 사랑 이야기의 배경으로서 하루키가 제시하는 거대담론은, 독자로 하여금 그가 던져놓은 수수께끼를 추리해 나가는 과정에서 지적인 충만감을 맛보게 함과 동시에 자신이 세계사의 거대한 흐름의 일부라는 자존감에 빛을 비춰준다. 하루키의 『1Q84』를 읽는다는 것은, 나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한 지극히 개인적인 사랑이야기를, 나를 둘러싼 거대한 우주 또는 사회와의 충돌을 통해 환상적인 방식으로 펼쳐보는, 감성과 이성의 짜릿한 유희와 같은 것이다.

누구나 간직한 첫사랑에 대한 미련을 낯선 판타지 세계로의 지적인 모험여행을 거쳐 첫사랑이 이루어지는 기적으로 일궈낸 해피엔딩 뒤에는, 대작의 안이한 결말이 영 하루키답지 않다며 또다시 속편의 화끈한 반전을 점치는 하루키 매니어들도 있는 모양이지만, 남겨진 수수께끼를 뒤로한 채 소년과 소녀의 첫사랑의 완성만큼은 영원하길 기대해 본다. 세상의 모든 첫사랑을 위하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