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이회창 '대세론' 굳혀가다 문턱서 또 낙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1997년 대통령선거에서 39만5백표 차로 석패했던 이회창. 2002년 그에게 다시 똑같은 악몽(惡夢)이 재현됐다. 역대 선거의 어느 당선자보다 많은 1천1백40여만표를 받고도 패배했다.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이회창은 밤마다 간절하게 기도했다.

"이회창이 선 이 길이 합당치 않으면 날 제쳐 주십시오. 그렇지 않다면 이 나라와 국민을 위해 뛸 수 있도록 붙잡고 힘을 주십시오. "

이회창은 또 국민에겐 이렇게 호소했다.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얼마 전 아버님이 돌아가셨습니다. 평생 정직과 청렴으로 사신 분이셨는데 아들이 후보란 이유로 많은 모략을 받았습니다. 이것도 제가 겪어야 할 희생이라고 봅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국민과 나라를 위해 일하고 싶습니다. 혼란과 불안에서 벗어나 나라다운 나라, 깨끗하고 정직한 정부를 만들고 싶습니다. "

하지만 19일 신(神)과 국민은, 이회창의 간절한 기도와 호소를 외면했다. 그것도 97년과 비슷한 표차였다. 한 인간이 감내하기엔 처절한 실패였다.

사실 이회창에겐 실패란 친숙지 않은 일이었다. 대법관으로, 감사원장에서 국무총리로 고속성장했고, 정치인으로서 6년도 그는 최정점에 있었다. 하지만 많은 상처를 입었고, 좌절도 겪었다. 그 사이 가다듬었던 '꿈'도 끝내 꺾였다.

이회창은 35년 6월 2일 황해도 서흥에서 서흥법원지청 검사분국 서기인 이홍규(李弘圭·올해 작고)와 김사순(金四純) 사이 4남1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회창의 외조부는 담양 창평 면장을 지난 김재희(金在晞)로 만석군 소리를 들었지만 이홍규가 도움을 뿌리쳐 생활이 어려웠다.

이회창은 이홍규의 잦은 전근으로 여러 차례 전학을 다녀야 했다. 42년 외가인 담양의 창평국민학교에 입학한 뒤 광주 서석국민학교, 순천 남국민학교를 거쳐 다시 서석국민학교로 옮겼다. 서석국민학교 5학년말 광주서중에 합격했으나 입학식은 청주중에서 치렀고, 1년 만에 경기중으로 전학갔다.

한국전쟁이 벌어지기 직전인 50년 3월 이홍규가 이회창 눈앞에 수갑을 차고 끌려갔다. '괘씸죄' 때문이라고 한다. 제때 피난가지 못한 이회창은 먹을 것을 구하러 다닌다. 부산 피란 시절엔 부산체신청 말단 노무직으로 소년가장이 되기도 했다.

이회창은 이홍규가 검사로 복직한 뒤에야 학교로 돌아갔다. 평범한 학생이던 이회창은 매사 적극적이 돼 변론반장을 맡았고, 당수 연습도 했다. 고3 땐 싸움하다 코뼈가 부러졌다. 이 사이 학교평가도 흥미·통솔성·적극성 평가가 '무(無)'에서 '유(有)'로 바뀌었다.

53년 이회창은 서울대 법대에 들어갔다. 3학년 말에 고시 사법과에 합격한 이회창은 60년 3월 서울지법 인천지원으로 발령났다. 이후 엘리트 법관 코스를 밟았다.

이회창은 62년 3월 한성수(韓聖壽)서울고등법원장의 둘째 딸 한인옥(韓仁玉)과 결혼했다. 한성수가 이회창을 눈여겨보고 중매를 부탁했다고 한다.

이회창은 81년 대법관(당시엔 대법원 판사)이 됐다. 만 46세. 동기 중 선두였고 3공화국 이래 가장 젊은 대법관이었다. 그는 진보적 소수의견을 많이 냈다. 86년 대법관 재임용에 탈락했으나 88년 재발탁됐다.

이회창은 2차 대법관 시절 중앙선관위원장을 겸임하며 타락선거에 맞섰다. 93년에 감사원장이 돼 유신 이후 처음으로 청와대 비서실·경호실에 대해 현장감사를 실시하는 등 '독립성'을 보였다. 그리고 그해 12월 이회창은 국무총리가 된다. 김영삼(金泳三·YS) 당시 대통령이 우루과이라운드(UR)협상 타결로 쌀 시장 개방이 불가피해진 데 따른 국면전환용으로 발탁한 것이다. 이회창은 하지만 총리로서 한계를 느꼈다. "총리는 일하는 게 아니라 정부의 인기를 올려주는 직업이더구먼. 이래선 안되는데…"라고 되뇌었다. 결국 1백27일 만에 그만둔다.

이회창의 인기는 급등했다. 여야로부터 영입 구애를 받은 이회창은 96년 1월 YS의 요청을 받아들여 신한국당에 입당했다. 그뒤 정치인 이회창의 선거 성적표는 좋았다. 대부분 총재 또는 후보로 보낸 6년여 동안 96년·2000년 총선, 2002년 지방선거와 각종 재·보선을 승리로 이끌었고 원내 과반수가 넘는 거대 야당도 만들어냈다.

16대 국회의원 후보 공천에서 김윤환(金潤煥)·이기택(李基澤)·신상우(申相佑) 등 당내 중진을 대거 탈락시키며 '이회창식 리더십'을 보였고 국정을 좌지우지한다는 말도 들었다.

하지만 세풍(稅風)·총풍(銃風)·북풍(北風)·병풍(兵風)·안풍(安風·안기부자금 신한국당 유입사건)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의혹이 제기됐다. 정치 경력이 길지 않았음에도 일부 국민에겐 어느 누구보다 '구태 정치인'으로 각인되기도 했다. 급기야 노풍(盧風)·정풍(鄭風)에 흔들렸고, 막바지 단풍(單風·후보단일화 바람)으로 주저앉았다.

이회창은 자신의 선거에서만 두번 실패했다. 97년 39만표 차로 패배한 이회창은 "나는 좌절하지 않고 절대다수당인 한나라당에 부하된 시대적 소임을 다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그리곤 우뚝 일어섰다. 국민에게 그의 국정 경험과 5년 동안 대선 준비를 호소했다. 하지만 2002년 그는 또 다시 고배를 마셨다.

고정애 기자

ockham@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