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적 진행… 토론유도 실패 공정성에 매달려 자질 평가 제대로 못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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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세차례 실시된 제16대 대통령 선거 TV 합동토론회는 후보들의 인물됨됨이와 정책 차이점을 유권자들에게 알리는 데 실패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이같은 원인은 일차적으로 토론 포맷 등 TV 토론 운영 방식과 사회자의 역량 때문이었다. '후보 세명이 1분 질문에 1분30초 답변과 1분 재반론'이라는 운영 방식은 토론이 기계적으로 운영될 뿐 아니라 후보들이 자신의 생각을 충분히 전달할 시간과 기회가 부족했다.

질문지를 읽기에 바빴던 사회자의 기계적인 진행은 후보 간의 질문과 답변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못하는 원인이 됐고, 후보 간 질문과 토론이 엇갈리는 상황을 초래하기도 했다. TV 토론의 사회자는 카메라 샷을 비롯해 방송제작의 메커니즘에 익숙하고, 사회자로서 카리스마를 갖춰 토론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TV 토론 사회를 본 고려대 염재호 교수는 "토론 1∼2시간 전에 질문지를 넘겨받아 이를 숙지하기에도 바빴다"며 "현재의 TV 토론 운영 방식으로는 누가 사회를 보더라도 같은 문제점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더 큰 책임은 대통령선거방송토론위원회에 있다. 'TV 토론 참여 기준'을 정할 정도로 막강한 권한을 위임받은 위원회가 토론 운영 방식과 사회자 선정 등 본연의 역할과 임무에는 소홀히 했다는 비판이 거세다.

한나라당·민주당·자민련·민국당 등 4개 정당들이 추천한 인사와 방송학계·언론계·시민단체·법조계·공영방송사 인사 등 10명으로 구성된 위원회는 제1차 TV 토론이 끝난 후 돌출된 문제점들을 수용, 새로운 포맷과 진행을 꾀했어야 했다. 공영방송사를 대표해 위원회에 참여한 방송인들은 방송 실무에 능통해, 기존의 운영 방식으로는 생산적인 TV 토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해 TV 토론이 갖는 장점을 살리도록 기여했어야 마땅하다.

최종 책임은 정당에 있다. TV 토론이 유권자들에게 큰 영향력을 미친다는 점을 감안했다면 자체 공청회나 세미나를 통해 바람직한 TV 토론 운영 방식을 준비하고, 또 TV 토론 전문가를 위원회에 추천했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TV 토론 관계자들은 오히려 운영 방식에 불만을 제기했다. 이는 권한과 책임을 자각하지 못하는 전형적인 정치인들의 행동이었다고 언론학자들은 비판하고 있다.

연세대 최양수 교수는 "이번 TV 토론이 후보 간의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자신의 주장만 전달하는 연설의 장으로 전락해 식상한 토론회가 됐다"고 비판하면서 "공정성에만 매달려 후보들의 자질을 심도있게 드러내는 데는 실패했다"고 평가했다.

방송진흥원 송종길 박사는 "선거법에 의해 공영방송사가 60일 전에 대통령선거방송토론위원회를 구성해 TV 토론의 운영 방식과 포맷을 정하는 현행 제도로는 이미 불거진 TV 토론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없다"며 근본적으로 선거법 개정을 촉구했다.

미국 같이 전문가로 구성된 'TV 토론연구 특별팀'을 가동시켜 그 결과를 위원회가 받아들이는 방식이 한 대안이 될 수 있다. 또 제15대 선거 이후 5% 이상 지지를 받은 정당 후보도 참여할 수 있도록 한 기준은 유력 후보 간의 TV 토론을 기대한 유권자들을 맥빠지게 한 요인이 됐다.

김택환 미디어전문기자

tw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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