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 고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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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앨 고어(Al Gore)만큼 '준비된 대통령'도 드물다. 그의 정식 이름은 '앨버트 아널드 고어 주니어'다. 그의 아버지는 앨버트 고어 시니어. 아버지는 상·하 양원을 32년 간 지킨 민주당의 정치 거물이다. 아버지는 1998년 숨지기 직전까지 늘 아들을 "대통령으로 길러진 아이"라고 부르며 자랑스러워했다.

고어는 아버지의 훈육과 유훈에 따라 백악관을 향해 8년 단위로 확실한 단계를 밟아왔다. 그가 하버드대를 졸업하고 로스쿨에서 법학을 공부하다 하원의원에 당선된 것은 76년, 28세 때였다. 그는 8년 간 고향 테네시주의 하원의원으로 '성실한 일꾼' 이미지를 굳혔다. 아버지의 후광과 지원에 따라 그는 '테네시의 황태자'란 별명까지 얻었다.

그가 한단계 도약한 것은 84년. 고향 상원의원이 은퇴하자 곧바로 출마를 선언하고 당선됐다. 이후 다시 8년 간 상원의원으로 활약했다. 이어 93년 클린턴 전 대통령의 러닝메이트로 대선에 뛰어들었고 마지막 8년 간은 부통령으로 활동했다. 준비된 대통령으로서의 경력에 빈틈이 없다. 베트남전을 반대하면서도 69년 자원입대한 것도 자신과 아버지의 정치적 입지를 고려한 결정이다.

4반세기에 걸쳐 거의 백악관 현관문까지 다다른 그는 마침내 2000년엔 대선후보로 나섰다가 조지 W 부시 현 대통령에게 패했다.

고어만큼 억울한 대통령 후보도 없다. 그는 지난 대선에서 부시보다 약 54만표를 더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대권을 놓쳤다. 플로리다주의 재개표 과정을 두고 시비가 끊이지 않았지만 고어는 "당파심이 애국심을 앞설 수는 없다"며 승복했다. 그러나 고어의 속마음은 그의 지지자인 흑인감독 스파이크 리가 만든 다큐멘터리 '우리는 (승리를) 강탈당했다'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래서 2004년 대선에 재도전하리라 예상됐던 고어가 지난 15일엔 아예 대선 출마포기를 선언했다. "대선은 미래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는 포기선언의 변(辯)은 2년 전 승복(承服)연설만큼 인상적이다. 민주당 차기 대권후보로 가장 유력함에도 불구하고 고어는 조국의 미래를 위해 스스로 지나간 역사로 남기를 택한 셈이다. 우리의 대선주자들에게 미리 고어 얘기를 해두고 싶다.

오병상 대중문화팀장

obs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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