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번 돈은 쉽게 나간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경제 18면

부모님의 고향은 함경북도 청진과 황해도 개성이다. 6·25전쟁 때 내려와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고생을 많이 하셨다.

1950년대 작은 음식점을 운영하셨다. 당시에는 그날그날 돈이 생기면 은행에 가져가지 않고 장롱 안 이부자리에 깊이 묻어두곤 했는데, 내가 여섯살 때 옆집 이발소에서 불이 나는 바람에 옮겨 붙어 애써 모은 제법 큰 돈이 홀랑 불에 탄 적이 있다. 그래서 나는 경기도 용인 고모 집에서 1년 동안 지내야만 했다.

그렇게 고생하다가 장갑 사업에 손을 댔고 한국에서 최초로 장갑을 만들어 오늘날의 캉가루 장갑을 있게 하셨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70년 10월 중순께 또 한번 불이 났다. 그 때도 옆집에서 불이 옮겨 붙어 공장과 창고에 번졌다. 다행히 불은 금방 꺼졌지만 물 세례를 받은 창고안 장갑은 온통 젖어 있었다.

10월 말 출하를 코앞에 두고 생긴 화재로 회사와 가족들을 위태롭고 불안하게 만들었다. 큰딸인 나는 '용기를 내자'며 물에 젖은 수만개의 장갑을 며칠 밤을 새우며 깨끗한 물에 헹군 뒤 빨래 줄과 방바닥 위에 널어 말렸다. 하지만 소재가 가죽인지라 꾸덕꾸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해 겨울이 얼마나 추웠던지 물에 젖었던 장갑은 물론 귀퉁이가 불에 탄 장갑도 없어서 못팔았다.

아버님은 재단·미싱 기술은 잘 몰랐지만 어느 기술자보다 좋은 상품이 어떻게 나오는지를 아셨다. 대충대충 하는 법이 없고 '봉제사업은 손끝에서 나온다'고 강조하며 꼼꼼하게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셨다. 가죽 품질이 좋지 않던 시절에 좋은 가죽을 만나면 잠자리에서도 그 가죽을 손에 꼭 쥐고 주무시곤 하셨다.

아버님은 고생을 많이 해서 그런지 돈을 무척 아끼셨다. 위스키가 대중화된 뒤에도 아깝다고 하면서 소주를 드셨다. 아버님은 '피땀을 흘려 번 돈이야말로 진정 네 돈이 될 수 있다'고 자주 말씀하셨다. 쉽게 들어온 돈은 쉽게 나가는 법이라고 강조하셨다.

아버님의 사업을 이어 받아 20년 가까이 회사를 경영하고 있다. 국내 시장에 팔면서 군에도 납품하고 수출을 하는데 지난달 29일 무역의 날에 1천만불 수출탑을 받았다. 아버님과 직원들에게 감사한다.

나는 고교 3학년 때 예비고사를 보기 전날에도 장갑 일을 돕느라 장갑 케이스를 접어야 했다. 장갑 일을 처음 할 때나, 지금이나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품질이다. 나는 아버님이 직접 가르쳐주신 방법으로 품질을 최고로 여기며 제품을 만들고 있다. 바로 이 점이 캉가루 장갑이 사랑받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오늘도 나는 피땀을 흘려 번 돈만이 내 돈이 될 수 있다는 말을 되새기며 노력하고 있다. 이 정신은 자식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줄 생각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