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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담 … 바둑판 앞에선 세계인의 말이 통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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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떠나기 전엔 말로만 듣던 북구의 오로라, 노르웨이의 피오르 등을 떠올리며 관광을 염두에 뒀지만 막상 현지에 도착하니 눈코 뜰 새 없었다.

영어와 중국어가 상당한 수준인 목진석 9단(가운데)이 핀란드 탐페레의 잔디밭에 앉아 바둑을 복기하며 유럽 팬들과 대화하고 있다. 유럽콩그레스는 역사가 54년이나 된 대회로 유럽 각국과 아시아에서 평균 700~1000명쯤 참여한다.

파란 눈의 서양인들이 어찌나 진지하게 바둑에 몰두하는지 그 열성에 감동하여 도무지 자리를 뜰 수 없었다. 백야 현상으로 오후 11시에 해가 지고 오전 4시면 해가 떴다. 유럽인들은 온종일 시합에 몰두한 뒤에도 풀밭이든 실내든 어디든 모여 앉아 오후 11시까지 대국하고 복기했다. 각양각색의 국적들이 모였지만 바둑은 모든 말을 통하게 한다.

페어대회에서 우승한 체코의 클라라 3단(아마)과 목진석 9단.

난생처음 나는 영어 강의를 시도했다. 잔뜩 긴장했지만 바둑 용어 준비를 착실히 했고 또 곁에서 디아나가 도와주는 데 힘입어 별다른 어려움은 없었다. 체코의 클라라 3단(아마)과 짝을 이뤄 페어대회에 참가해 우승하기도 했다.

상금은 불과 600유로(약 90만원). 그러나 클라라가 어찌나 좋아하던지 나도 잠시 행복해졌다.

핀란드는 ‘행복한 나라’ 순위에서 거의 언제나 세계 1위를 하는 나라. 그러나 겉 모습은 전혀 화려하지 않다. 탐페레만 해도 그냥 평범한 중소도시 같았다. 대회는 한 초등학교에서 열렸는데 고색 창연한 건물 곳곳에 대화할 수 있는 응접세트 같은 것이 있었고 강당도 교실 중간에 입체적으로 놓여 있었다. 일렬로 죽 늘어선 한국 교실과는 너무 다른 풍경이었다. 바둑 두고 복기하고 대화하는데도 그만이었다.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한 얼굴로 바둑에 푹 잠겨 있는 유럽인들을 바라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전 세계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바둑판을 사이에 두고 수담을 나눈다면 세상은 얼마나 평화로워질까. 인종도 국경도 없는 바둑판 위에서 얼마나 친해질까. 프로기사가 이런 말을 하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정신의 안식처로 바둑만 한 것이 또 있을까.

축구시합도 하고 맥주도 마시면서 유럽인들은 참으로 자유롭게 바둑을 즐겼다. 요란한 마이크 소리 한 번 들리지 않은 채 대회는 질서 정연하고 부드럽게 흘러갔다. 일주일이 눈 깜짝할 새에 흘러갔다.

그것은 축제였다. 조용히 마음을 나누는 바둑만의 축제였다. 프로는 강의나 복기에 돈을 받지만 이곳에선 돈 한 푼 받지 않는데도 전혀 서운하지 않았다. 내가 떠난다 하자 새로 사귄 유럽 친구들이 무척 아쉬워했다. 내년 유럽콩그레스는 프랑스 보르도, 후년엔 독일에서 열린다. 친구들의 열렬한 초청에 또 오겠다고 약속했다. 관광 한번 못한 유럽여행이지만 좋은 추억으로 남을 것 같다.

◆목진석 9단은=1980년 서울생으로 15세 때 중국의 녜웨이핑 9단을 격파해 ‘괴동’이란 별명을 얻었다. 신인왕전, 프로십걸전, 바둑왕전 등에서 우승했다. 2007년 연간 최다승. 현 농심배 한국대표이자 KB한국리그 티브로드팀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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