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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 26년 만에 첫 남북 적십자회담 열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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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1971년 8월 20일 판문점 중립국감시위원회 회의실에서 열린 남북적십자회담. 남(이창렬)과 북(서성철, 안경 쓴 이)의 적십자사 파견원이 역사적인 악수를 하려고 손을 내밀고 있다.

1971년 8월 20일 분단 후 처음으로 남과 북의 적십자 대표들이 한자리에 앉았다. 군사정전위원회는 자주 개최되었지만, 인도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남한과 북한만의 민간기관이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그해 8월 12일 대한적십자사의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회담 제의를 북한 적십자사가 수락하면서 적십자회담이 이루어졌다. 몇 차례의 예비회담을 거쳐 1972년 서울과 평양에서 1·2차 본회담이 개최되었고 여기에서 남북 이산가족과 친척들의 주소 및 생사 확인, 자유로운 방문, 상봉, 서신왕래, 그리고 자유의사에 의한 재결합 등 5개 항의 의제가 합의되었다.

시민들은 환호했지만, 어리둥절하기도 했다. 분단 이후 25년 만에 이산가족들이 만나고 전쟁이 아닌 남북 간 긴장완화의 기회가 온 것이다. 평화통일을 주장했던 조봉암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남북 학생회담을 주장했던 학생들 대부분이 구속되었던 시대로부터 10년밖에 되지 않았으며 불과 3년 전에 김신조 사건과 푸에블로호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적십자회담은 정치적인 문제로 1972년 말 이후 더 이상 정상적으로 진행되지 못했다. 남북 적십자회담과 7·4 공동성명이 남북 간의 화해가 아니라 남한에서 유신체제, 북한에서 사회주의헌법 개정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북한은 반공입법의 철폐를 회담의 전제조건으로 내세웠고, 결국 1973년 김일성의 동생인 김영주의 선언에 의해 적십자회담은 중단되었다.

어쩌면 1971년의 적십자회담은 그 출발에서부터 실패가 예견되었다고 할 수도 있다. 적십자 예비회담이 있은 직후 통일사회당의 김철이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었고, 김종필 국무총리는 제주에서 “남북대화에 흥분하는 것은 금물이며, 중단사태도 예상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적십자회담 다음 날에는 영화 ‘실미도’로 알려진 특수부대원들의 버스 탈취 사건이 발생하는 등 뒤숭숭한 상황이 계속되었다.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남북 간의 접촉이 한반도 내 정책결정자들의 의지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데탕트라고 하는 외부 충격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이다. 닉슨 행정부는 주한미군의 감축을 추진했는데, 이는 한반도에서의 긴장완화 없이는 어려운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미국은 남과 북에 접촉을 통한 화해를 요구했던 것이다.

이후 적십자회담은 계속 안팎으로의 사회적·정치적 상황에 따라 좌우되었다. 인도주의적 문제들은 정치적 목적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그러나 지금도 남과 북은 인도주의적 문제를 정치적 목적 아래 위치 짓고 있다. 그리고 아직도 죽기 전에 가족·친지·친우들을 만나고 고향을 방문하고 싶어 하는 수많은 사람이 마음을 졸이며 살아가고 있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한국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