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로 보는 세상] 未央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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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천추만세 장락미앙(千秋萬世 長樂未央)’. 한(漢)나라 유적지에서 나오는 기와에 자주 보이는 문구다. ‘오랫동안 황제(으뜸)로서 장수하고 변함없으며, 오래도록 즐겁고 끝이 없기를 바란다’는 축원의 글귀다. 한 고조 유방은 장안(長安, 지금의 시안)을 수도로 삼고 장락궁(長樂宮)과 미앙궁(未央宮)을 지었다. 자신이 세운 나라가 대대손손 번성하기를 바라는 의지를 궁궐 이름에 담았다.

‘미(未)는 맛(味)이다. 맛은 6월에 난다.…나무(木)에 다시 가지와 잎이 나는 것을 상형했다’. 『설문해자』의 설명이다. 미월(未月)은 초목의 과실에 맛이 드는 6월을 뜻한다. 또한 ‘아직’ ‘부족하다’는 뜻이다. 앙(央)은 가운데다. 물체(冂) 안에 사람을 뜻하는 대(大)자가 들어선 모양이다. 사람이 가운데 똑바로 서 있으니 중심을 뜻한다. ‘오래되다’라는 의미도 있다.

한나라가 ‘끝이 없고 무궁무진하다’는 미진(未盡)의 뜻으로 즐겨 쓴 미앙(未央)은 본디 ‘아직 반도 되지 않았다’는 『시경(詩經)』 시구에서 나왔다. ‘밤이 얼마나 되었는가? 밤이 절반도 되지 않았는데 뜰의 횃불이 빛나는구나(夜如何其? 夜未央, 庭燎之光).’ 즉 중앙(中央)이 한가운데라면 미앙은 아직 절반에 이르지 못하다(未半)라는 뜻이다. 한나라의 키워드가 미앙이었다면 중화민국은 ‘중앙’을, 중화인민공화국은 ‘인민(人民)’을 국가 브랜드로 삼았다.

『미앙가(未央歌)』라는 중국 현대소설이 있다. 루차오(鹿橋)가 썼다. 항전 시기 쿤밍(昆明)에 베이징대, 칭화대, 난카이대 등을 합쳐 세워졌던 서남연합대학을 배경으로 젊은 청춘들의 꿈과 사랑과 우정을 그렸다. 몇 해 전 이안 감독이 영화 ‘색계(色戒)’를 찍으면서 출연배우들에게 필독시켜 유명세를 탔던 작품이다. 아직 인생의 절반에도 못 미친 무궁무진한 젊은이들의 이야기다.

여름 휴가를 맞아 중국의 천년 고도 시안(西安)에 왔다. 한나라 미앙·장락궁 유적지를 들렀다. 강한 한나라와 번성한 당나라(强漢盛唐)를 재현하듯 시안은 지금 아시아 최대 기차역 건설, 베이징 자금성 2.5배 크기의 당 대명궁(大明宮) 복원 등 초대형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현재 중국의 성쇠 사이클은 미앙인 듯하다. 한국의 국세(國勢)는 과연 미앙인가 중앙일까? 혹시 그마저 이미 지난 것은 아닐까?

신경진 중국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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