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8 대선후보TV합동토론경제분야]주제 '소화불량'… 산만한 토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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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날씨가 추워지면 추워질수록 섭씨와 화씨의 차이는 줄어든다. 마침내 섭씨 영하 40도가 되면 화씨로도 영하 40도가 되므로 같아져 버린다. 대선전은 이와는 달리 열기가 뜨거워질수록 양대 후보 간의 공약들이 닮아 가는 것 같다. 한 표라도 더 얻기 위해 인기있는 정책들을 얘기하려다 보니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그렇게 되면 후보 간의 토론회는 그만큼 맥이 빠질 수밖에 없다. 여기에다 다루는 주제가 너무 많다 보면 더욱 그렇게 되기 마련이다. 경제·과학 분야에 관한 대선후보 간의 제2차 TV토론은 이런 취약점을 안고 시작됐고 예상대로 비교적 조용하게 끝을 맺었다.

가계 부채 문제, 엄청나게 늘어난 비정규직 문제, 이공계 기피 현상, 지역 균형발전 문제 등에 관해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와 민주당 노무현 후보의 의견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가계대출은 충격을 주지않으면서 줄여나가야 하고, 파견근로제는 폐지하지 않으면서 정규직이 늘어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하며, 이공계 학생에 대한 장학금과 이공계 출신에 대한 처우를 대폭 개선하는 한편 지방대학을 일류학교로 육성해야 한다는 두루뭉술한 의견들이 엇비슷하게 제시됐다.

농업정책에 관해서도 쌀 관세화의 유예를 위해서 최대한 노력한다는 동일한 입장을 표시했다. 세계의 무역환경이 이를 용납하기 어려운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는데도 두 후보는 한결같이 우선 농민들에게 듣기 좋은 얘기를 했다.

사실 관전자로서는 농업정책·재벌정책 그리고 노동임금정책에 관해서는 후보들 간에 견해차가 커서 불꽃 튀는 접전이 있었으면 하고 기대했었다. 특히 이회창 후보가 열세를 만회하려면 盧후보 측의 후보 단일화 이후 조율된 정책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일관성이 있는지를 따져 묻지 않을까 예상했지만 그렇게 진행되지는 못해 토론회 보는 재미가 더욱 줄어들었다. 다만 개방 및 노동문제와 관련해 노무현 후보와 권영길 후보 간의 설전이 있었을 뿐이었다. 새롭게 경제강국으로 부상하는 중국과 기술경제 대국인 일본의 틈바구니에서 우리 경제가 어떻게 경쟁력을 갖추고 살 길을 찾아가야 할 것인가 하는 대안은 지극히 중요한 문제다. 그러나 경제문제에 관한 후보자들의 비전과 전략에 대한 국민의 관심에 비해 토론회의 내용은 빈약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이렇게 된 데는 물론 처음에 지적한 대로 후보들의 입장 변화나 인기위주의 토론 자세에도 문제가 있지만 토론의 진행 방식에도 큰 구멍이 있었다고 하겠다. 우선 이슈들을 너무 많이 산만하게 제시하고 답변시간을 짧게 함으로써 심도있는 토론이 불가능하게 만들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중요성이 높으면서 후보들 사이에 견해 차이가 큰 주제를 서너 가지만 골라서 깊이 있는 토론을 유도했어야 했다. 재벌정책·노동문제·농업문제·분배와 성장의 조화문제 중에서 선택할 수 있었을 것이다. 현재 경기에 대한 진단과 내년 전망에 관해서 후보들의 의견을 들어보는 것도 좋았을 것이다.

대선 후보들의 토론을 일반적인 시사토론회처럼 과격하게 할 필요는 없지만 이견이 있는 부분은 분명하게 밝힐 수 있는 시간이 주어져야 한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다른 부분의 시간을 줄이고 일 대 일로 토론하는 시간을 좀 더 배정해 주었다면 시청하는 국민에게도 훨씬 흥미있는 토론회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후보들이 외환위기를 'IMF 위기'라고 표현하는 것은 잘못이다. 외환위기를 IMF가 초래한 것은 아니므로 고쳐서 제대로 쓰는 것이 좋겠다.

노성태 본사 경제연구소장

str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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