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주의' 유혹과 모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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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꼭 10년 전인 1992년 12월 11일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그러나 '부산 초원 복집 사건'하면 "아, 하-"하고 어렴풋이 떠오르는 게 있을 것이다. 대통령 선거일을 불과 1주일여 남겨놓고 김기춘 전 법무부장관이 기관장들에게 지역감정을 불러일으키도록 다그쳤던 사건이다.

당시 모임은 안기부와 기무사·경찰 등 해당 지역의 정보 핵심 관계자들뿐 아니라 행정 책임자들도 참석한 일종의 선거대책회의 성격을 띠었다. 그 자리에서 김영삼(金泳三)후보를 지원하기 위한 수단으로 지역갈등을 조장하고,이를 위해 언론기관 등에 돈까지 뿌리라고 채근한 게 들통났다. 그것도 상대당 후보 측의 도청에 의해 대책회의 전모가 드러나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이번 16대 대선 투표일이 가까워지면서 한나라당이나 민주당 관계자들이 교묘히 지역감정을 건드리며 위험선에 접근하고 있다. 우리의 정치 및 선거기술이 여전히 음험하고 지역주의 조장으로 생존할 수 있는 텃밭이 있기 때문이다.

최근 한나라당 최고위원들이나 대변인단, 그리고 TV 토론 등에 나선 이회창(李會昌)후보 지지자의 발언을 보자. 민주당 노무현(盧武鉉)후보에 대한 '호남의 몰표'를 지나치게 부각시켜 영남권의 응집력을 직·간접적으로 요구한다. 또 그런 현상을 이라크에서 후세인을 지지하는 수준으로 비교한다. 더구나 호남지역 유세를 하면서 돌멩이에 맞았다고 주장하거나 아예 맞고 오라고 부추긴다. 문제의 발언으로 시끄러워지면 농담이라거나 아예 없었다는 식으로 빠져나간다.

민주당 선거대책위원들이나 지지자들의 언행은 어떤가. 한나라당이 부산에서 지역감정을 자극하며 '허위사실을 선동하는 작태'를 벌였다고 성토한다. 한나라당 주요 당직자들의 자극적인 발언들을 배포, 지역감정을 증폭시켜 반사이익을 노린다. 한나라당이 이회창 후보의 광주지역 유세 때 계란세례 자작극을 준비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민주당에서 흘러 나온다. TV 찬조 연설을 한 양당 지지자들은 지역감정을 깊게 드러낸 네티즌들의 사이버 테러에 죽도록 시달린다. 지역색을 크게 드러내고 있는 일부 언론도 도마에 오른다.

눈 밝은 유권자들은 이런 기막힌 일들의 이면을 꿰뚫어 본다. 정치인들의 저열한 수작과 편향된 시각도 읽는다. 그러나 선거일이 다가오고 정당 간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정치 이념은 중요성을 갖지 못한다. 일부 정치인은 오히려 지역주의로 승부를 판가름해야 한다는 위험천만한 생각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92년 초원복집 사건 때 지역감정을 조장하고 언론 매수를 획책했던 인사들은 모두 각 분야 고위 관계자들이었다. 그때와 지금의 정치상황은 완전히 다르다. 지금까지 갖가지 폭로전도 별로 효과가 없다.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돌발변수에 주목한다. 후보의 지지율에 따라 위기감이 확산되고 지역감정 폭발을 이의 돌파구로 삼는 시대착오적 만용이 나타나지 않도록 특별경계태세가 필요하다.

양당 관계자들은 특정지역의 응집력을 소구(訴求)하는 편법에 연연하지 않기를 바란다. 크게 사고쳐야 막힌 게 뚫린다는 발상이 행여 터져나오면 어떡할까. 유혹은 언제나 달콤하다. 불길한 야망과 아부에 길들인 인사들은 그런 유혹에 약하다.

국민이 눈 똑바로 뜨고 심판한다면 헛된 꿈을 꾸는 자가 오히려 역풍을 맞게 될 것이다. 지난 월드컵대회 때 태극기에 모아진 민족주의 마케팅은 대한민국의 꿈을 이뤘다. 그런 우리에게 지역갈등 조장행위는 정말 참을 수 없는 일이다. 꼭 털어내야 할 3金 시대의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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