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간섭하는 정부, 짐싸는 기업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엑소더스(Exodus)란 구약성서의 출애굽기를 말한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이 단어는 우리 기업의 해외탈출을 연상케 하는 씁쓸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최근 상공회의소의 실태조사에 의하면 전체 응답기업의 78%가 이미 공장을 해외로 옮겼거나 앞으로 이전할 계획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이렇듯 기업이 제 둥지를 떠나 낯선 곳으로 가는 이유는 불문가지다. 임금, 고용 유연성, 노사관계,규제와 같은 경영여건이 다른 나라에 비해 뒤떨어지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지난 5년 동안 우리는 IMF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도 열심히 달려왔다. 외형보다는 내실을 다지는 것이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수익성과 현금 흐름이 왜 중요한가를 절감하게 되었다. 또 경영의 투명성 확보와 주주 중시 경영이 점차 자리를 잡게 되었고 핵심사업 위주로의 구조조정도 어느 정도 이뤄졌다. 이러한 과정에서 30대그룹 중 16개그룹이 사라져 버리고 수십년에 걸쳐 힘겹게 이뤄놓은 알짜기업들을 팔아야 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이같이 커다란 변화의 물결 가운데서도 기업을 둘러싼 경영환경만은 별반 나아진 것이 없는 것 같다. 역대 정권들은 언제나 집권 초기에는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겠다고 약속을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약속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한편에서는 규제완화 정도로는 불충분하다며 규제개혁·철폐까지 외치면서 또 한편으로는 기업의 발목을 잡는 새로운 규제들이 끊임없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미국에서조차 효과가 검증되지 않아 논란이 되고 있는 집단소송제, 집중투표제, 회계제도 개혁안과 같은 새로운 제도들의 도입이 좋은 예다.

정부가 구상하고 있는 연기금의 적극적인 의결권 행사방침만 해도 그렇다. 주식회사제도하에서 소유 지분만큼 의결권을 행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지만 상호출자 제한이나 계열사에 대한 의결권 제한 등 기업에 대한 규제는 풀지 않고 이를 시행하는 것은 불공정게임이다.

그동안 규제가 상당히 완화됐다고는 하는데 기업이 느끼는 체감 규제는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게 없다는 불만이 나오는 것도 다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경제는 어디까지나 경제논리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 정치논리, 힘의 논리에 의해 이리저리 흔들린다면 이는 자본주의의 뿌리를 위태롭게 하는 커다란 위협이 된다. 정부가 집단이기주의나 불법행동에 대해 법과 원칙에 따라 단호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인기나 여론을 의식한 포퓰리즘에 젖는다면 기업은 누구를 믿고 경영을 하라는 말인가.

과거 개발연대 때 국가가 유일한 자원의 배분자고 기업은 이를 그대로 따르는 추종자였다면, 지금은 기업이 성장의 주역이 돼야 하고 정부는 기업을 뒤에서 밀어주는 후원자의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이제 대통령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다. 어느 분이 대통령이 되더라도 말이 아닌 행동으로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어주었으면 하는 것이 모든 기업인들의 한결같은 바람이다. 만약 차기정부에서도 이러한 소망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우리 기업의 엑소더스현상은 더욱 심해질 것이고 외국투자가들도 더 이상 우리나라에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선진국의 사례를 보면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구매력 평가기준으로 2만달러에 달하는 시점에서 본격적인 산업 공동화 현상이 나타난다. 물가나 환율전망 등을 감안할 때 우리도 대략 5년 후면 이 수준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지만 지금같이 열악한 경영여건이 개선되지 않는다면 그 시간은 훨씬 앞당겨질 수도 있다.

정부의 힘보다 더 무서운 것이 시장의 힘이다. 21세기 국경 없는 경쟁의 시대에 있어서 진정한 기업의 경쟁력은 법이나 제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경쟁과 시장의 감시기능에 의해 더 효과적으로 제고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남의 것을 비판 없이 수용하거나 그대로 모방하는 것에서 벗어나 우리 기업의 현실과 여건에 맞는 정책적 대안을 찾는 진지한 노력과 고민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산업의 공동화와 조로현상을 불러오는 기업의 엑소더스를 막을 수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