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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나카쓰市 화장터 겸 공원 '바람의 언덕' 혐오시설이 주민 쉼터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오전 10시 '개관'시간이 되면 카메라를 둘러멘 젊은이들이 팸플릿을 받아들고 입장한다. 연신 셔터를 눌러대다 때로는 열심히 메모를 하기도 한다. 구내공원에는 소풍을 온 어린이들이 재잘거리며 뛰어논다.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연상시키는 분위기지만 사실은 화장터다. 1996년 문을 연 일본 오이타(大分)현 나카쓰(中津)시의 '바람의 언덕 화장터'는 혐오시설이 아닌 지역 명소로 자리잡은 곳이다.

이곳의 가장 큰 특징은 화장터 특유의 연기와 악취가 전혀 없다는 점이다. 재연소 버너가 달린 최신 화장로를 설치, 시신을 태울 때 나오는 연기를 정화해 배기구로 내보내고 있다. 이 때문에 다른 화장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을씨년스러운 굴뚝이 없다.

화장로 하나에 3천만엔(약 3억원)이나 하지만 과감하게 투자했다는 것이 시청 측 설명이다. 전체 공사비 15억5천7백만엔 중 화장로를 비롯한 설비비가 4억8백만엔으로 26%가 넘는다.

처리시설도 여유있게 해놓았다. 나카쓰시는 인구 7만3천명 중 사망자수를 연간 1%인 7백30명으로 잡고 있다. 화장터를 3백65일 풀가동하면 하루 2건 꼴이다. 그러나 화장이 몰릴 때를 대비해 화장로는 5개를 설치했다. 유족들은 시간에 쫓기거나 다른 유족들과 뒤엉키지 않고 넉넉하게 화장을 치를 수 있다.

화장터 부지 내에는 '바람의 언덕'이라는 공원을 조성했다. 1만평의 부지 중 3분의2가 공원이다. 울타리가 없어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들며 공원 내 화장실이나 잔디밭을 이용할 수 있다. 공사 중 발견된 고분도 그대로 보존해뒀다. 나카쓰시의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서 자주 소풍을 오기도 한다. 어린이들의 소풍장소로 이용되는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화장터다.

설계는 일본을 대표하는 건축가 중 한명인 마키 후미히코(文彦·74)에게 의뢰했다. 게이오대의 창립자인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가 유소년기를 나카쓰에서 보낸 것을 기념해 게이오대 캠퍼스를 설계한 마키를 선정했다고 한다. 그의 대표작이 된 '바람의 언덕 화장터'는 일본 건축계의 걸작으로 꼽힌다. 이를 감상하러 미술관 가는 기분으로 찾아오는 사람이 매달 1백여명에 달한다.

화장률이 99.5%에 달하는 일본에서도 화장터는 역시 혐오시설이다. 화장터를 세우려는 지방자치단체는 늘 지역주민의 반대에 부닥치고 있다.

그러나 이곳만큼은 바로 옆에 민가가 붙어 있는데도 주민들의 불만이 전혀 없다. 오히려 지역의 자랑거리로 자리잡았다. 그러다보니 화장터 건립을 추진 중인 다른 지자체들의 연구대상이 되고 있다.

노바타 스에키치(野畑末吉)관리소장은 "이 정도 시설이면 도심 한가운데 자리잡아도 전혀 문제될 게 없다"며 "미래의 화장터 모델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나카쓰=남윤호 특파원

yhn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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