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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노동자 직업병 모른 척할 건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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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경기도 화성시에 있는 한 액정모니터 부품 제조 공장에서 태국인 여성노동자 여덟 명이 '노말헥산'(n-Hexane)이라는 유독성 세척제에 중독돼 하반신이 마비되는 '다발성 신경장애'에 걸렸다는 사실이 최근 밝혀졌다. 세 명은 지난해 10월 하반신 마비 증상을 보였고, 그중 한 명은 앉은뱅이 신세에 상체까지 마비가 오니까, 회사에서는 치료를 해주기는커녕 편도 항공권과 한국 돈 10만원을 주고 태국으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최근 이 병이 문제가 되자, 한국의 인권운동가들이 급히 태국으로 가서 그들을 한국으로 데리고 왔다. 현재 그들은 경기도 안산중앙병원에서 검진.치료를 받고 있다.

기업이 비용과 효율성만 따진다면 인권이 희생될 가능성은 그만큼 커진다. 그것은 내국인이나 외국인 근로자 모두에게 마찬가지다. 이번 사건은 그동안 사각지대에 놓여있던 불법 체류 외국인 근로자 산재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한 첫 사례다.

일명 '앉은뱅이병'으로 불리는 이 병은 노말헥산에 아무런 보호장비 없이 노출될 때 걸린다.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장갑과 얼굴 보호용 장구 및 방독마스크만 쓰고 일하면 얼마든지 예방할 수 있는 병이다. 그런데 태국인 여성노동자들은 밀폐된 공간에서 아무런 보호장비 없이 흰 가운만 하나 입고, 하루 평균 15시간씩 최고 3년 동안 일해 왔다고 한다. 그 공장에서 일하는 한국인 노동자들은 이처럼 위험하고 힘든 일을 하지 않으려 했고, 그 일은 외국인노동자의 몫이었다. 더구나 그들 중 일곱 명은 산업연수생으로 입국해 체류기간을 초과한 불법 체류자였으므로, 회사에서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위험물질을 취급하지만 건강검진을 받은 적이 없었고, 병을 얻고도 치료를 한동안 받지 못했다.

노동부가 이 회사의 작업환경을 측정한 결과, 2003년 12월과 2004년 4월 두 차례에 걸쳐 검사실의 노말헥산 노출 농도가 기준치를 넘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이 회사는 이 사실을 안 뒤에도 노말헥산을 계속 사용해 노동자들이 노말헥산에 중독되도록 방치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이 회사의 한국인 관리자들이 외국인노동자들에게 최소한의 안전장비조차 제공하지 않은 것은, 불법 체류자라는 약점 때문에 자신의 권리를 제대로 요구하지 못하는 외국인노동자의 처지를 악용한 부당한 처사였다.

더욱이 경악할 만한 사실은 직업병이 의심되는 세 명에게 소정의 절차를 밟아 치료를 해주지 않은 채,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서둘러 태국으로 돌려보냈다는 점이다. 현행 산업재해보상법에 의하면, 국내 기업에서 일하는 불법체류 외국인노동자도 산업재해 판정을 받으면 치료와 보상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 회사는 불법 체류자 고용으로 인한 불이익을 모면하기 위해 인도적인 관점에서 당연히 취해야 할 절차를 무시해버렸다. 타인의 생명과 건강을 위협하는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경기도 화성경찰서는 안전장비를 지급하지 않고 환기시설을 설치하지 않은 이 회사의 대표와 공장장에 대해 업무상 과실치상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이번 사건은 외국인노동자의 인권을 유린하는 나라로 한국의 국가 이미지를 실추시킨 사례라 할 수 있다. 고용허가제 실시 이후 불법 체류자에게도 산업재해보상보험 적용 등 나름대로 제도 개선이 이뤄졌다. 그러나 정작 그 제도를 운용하는 한국인들의 마음 자세와 행동은 여전히 차별적이다. 공무원들은 "불법 체류자라도 기본적인 인권은 보장하고 있다"고 강변하지만, 불법 체류 외국인노동자들은 아파서 쓰러지기 전까지는 한국의 법과 제도의 혜택을 보지 못하고 있다. 이 사건은 개인의 무지와 방심으로 일어난 것이라며 덮어버리기엔 너무나 심각한 사안이다. 한국인 전체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혔다. 이 사건은 제도 개선만으로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안이한 인식에 경종을 울린 것이다. 모든 한국인이 "외국인노동자도 한국인과 동등한 인간이다"라는 마음과 열린 자세를 내면화하지 않으면 이러한 비극은 또다시 발생할 수밖에 없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