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어디까지 악한가 폴란드와 한국의 경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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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아비 죽은 하무자귀야 총각 죽은 몽달귀야/너도 먹고 물러가라/…/총 맞고 칼 맞고 가던 귀신/불에 타 일그러지고 재가 된 귀신아/너도 많이 먹구 물러가라/인정 받고 노자 받고 좋은데로 천도(薦度)하소사".

소설의 12개 장(章)이 굿판의 틀을 빌리고 있는 황석영의 문제작 『손님』(창작과 비평사, 2001)은 이런 뒤풀이로 대미(大尾)를 본다. 따라서 '근현대사를 위한 오귀굿' 한 판으로 꾸며진 장편소설이 이 작품이다.

구체적으로 이 작품은 6·25 당시 '총 맞고 칼 맞아' 죽은 이들에게 바쳐진다. 소설에는 그 다양한 혼령들이 번갈아 등장해 이 땅의 산 자들과 함께 생전 자신들의 죄업을 현장검증하듯, 혹은 넋두리하듯 펼쳐 보인다. 종래 리얼리즘의 틀마저 벗어던진 남미식 마술적 리얼리즘의 『손님』은 문단 내의 평가도 매우 높지만, 현대사의 증언으로도 그 어떤 학술서에 못지않다. 그걸 짚어보는 게 오늘의 주제다.

표면적으로는 재미동포 목사 류요섭의 고향 방문으로 시작하는 이 작품은 그곳, 즉 황해도 신천을 무대로 벌어졌던 최악의 학살 규명에 초점을 맞춘다. 1950년 말 3만5천여 주민이 희생된 6·25 최대 민간인 살육극. 이에 대한 북한의 공식 입장은 미군의 만행이라는 쪽이다. 현지에 세워진 미제학살기념관 운영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황석영은 그걸 정면 부인한다.

"미군이든 국방군이든 정규군은 당시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2백23쪽)고 언명한 것이다. 작가 자신의 방북체험을 포함, 10년여 자료조사를 토대로 해 나온 이 작품은 신천 학살의 숨겨진 진상은 다름아닌 '이웃끼리의 살육'임을 주도면밀하게 규명해낸다. 놀랍다. 과연 그게 사실이라면 그 이웃들은 과연 어떤 이웃이었던가. 수대에 걸쳐 얼굴을 마주 대온 한 마을 사람들이 아닌가.

그렇다면 같은 민족, 아니 이웃끼리 아우슈비츠의 생지옥를 연출해냈다는 결론이 불가피하다.

황석영은 '작가의 말'을 통해 "그 학살은 우리 내부에서 저질러진 일"이라고 재확인한다. 물론 이 작품의 미덕은 당시 서로를 "나는 천사, 너는 짐승"이라고 믿었던 사회주의자·기독교인들을 가해자·피해자로 칸막이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외려 근현대 들어 바다 건너서 온 손님(사회주의·기독교), 즉 유령들의 놀음에 우리가 허깨비 춤을 춰왔음을 통렬하게 일깨워준다.

자, 『손님』을 되읽는 것은 이유가 있다. 얼마 전 평론가 1백9명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에서 황석영이 20세기 최고의 소설가로 꼽혀서가 아니다. 악(惡)이란 것이 항용 생각하듯 뿔 달린 괴수의 예외적 소행이 아니라는 것, 그것은 이웃과 나를 포함한 평범한 얼굴일 수도 있음을 깨우쳐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보름 전 '임지현 교수의 유목민 통신'을 기억하실지 모르겠다. 현지에서 보내온 그 칼럼에 따르면, 그곳에서도 오귀굿이 한창이다.

그것이 폴란드 동부의 작은 마을 '예드바브네 학살'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인 1941년 7월 그 마을에서 유대인 1천6백명이 집단학살됐는데, 문제는 그것이 나치의 만행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고, 놀랍게도 그들 유대인의 이웃이었던 폴란드인들의 손에 의해 저질러진 비극이었다는 것이 최근 확인됐다. 묻혀온 예드바브네의 진실을 알린 것이 유대인 역사가 얀 그로스의 저술 『이웃들』이라면, 서울에서는 황석영의 작품이 동시에 음미될 만한 것이다.

추한 현실의 뒷모습을 마주하는 데 그렇게 오랜, 반세기 넘는 세월이 요구되는지도 모를 일인데, 어쨌거나 폴란드 현지에서 보내온 '임지현 교수의 유목민 통신'은 실은 전체가 『이웃들』 이야기로 채워져 있었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자는 뜻으로 기자는 국내의 신간들인 피터 마쓰의 『네 이웃을 사랑하라-20세기 유럽 야만의 기록』(미래의 창)과 문부식의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삼인)에 관한 정보를 집어넣어 칼럼의 뒷대목을 보충을 했다.

했더니 필자에게서 항의 메일이 왔다. 두 권의 책이 적절치 않은 것은 아니지만, 섬세한 뉘앙스를 전하는 데 장애가 됐고, 기왕 내용상의 보충을 하려 했다면 예드바브네 학살과 똑같은 구조의 신천 학살 사건을 규명한 황석영의 『손님』을 언급하는 게 좋았을 것이라는 지적이었다. 과연 그랬다. 기회에 우리 주변에 도사린 '악(惡)의 평범성'을 성찰하려 했던 임교수의 의도를 새삼 재확인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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