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청 없다" 믿을 수 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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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한나라당 폭로로 불거진 국정원 도청 의혹이 점점 증폭되고 있다. 신건 국정원장은 도청 사실을 부인하며 제시된 자료는 국정원 문건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도청당한 당사자들이 상당수 통화 내용을 시인한데다 박관용 국회의장까지 도청당했다고 밝히는 등 도청 의혹이 추가돼 국민을 헷갈리게 하고 있다.

辛국정원장은 제시된 자료는 국정원이 쓰는 활자체가 아닌데다 용어나 조잡한 수준 등으로 미뤄 국정원이 작성한 것이 아니라고 밝혔다. 그는 또 국정원 감청시설을 현장검증하자며, 도청하지 않으므로 국민은 안심하고 통화하라고 덧붙였다. 아울러 "자료를 보자마자 가짜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해 한나라당의 조작 의혹을 제기했다.

그러나 "도청 없다"는 정부 측 말을 액면대로 믿을 사람이 있을까. 폭로가 있기 전부터 도청은 우리 사회의 공공연한 비밀이지 않았는가. 고위 공무원은 물론이고 여야 정치인과 청와대 관계자, 언론사 간부, 심지어 수사·정보기관 수뇌부까지 도청 공포에 시달린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사회 지도급 인사들이 휴대전화를 몇개씩 들고다니며 교대로 사용해온 현실 때문에 도청 자료가 나올 때마다 설득력을 갖게 된다. 결국 몇 차례나 제기된 도청 의혹을 방치하는 바람에 도청 공포가 만연되도록 한 책임이 국정원에 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된다.

도청 폭로에 대한 정치권의 반응도 괴이하다. 한나라당 관계자나 출입기자, 언론사 간부 등은 도청당한 사실을 대체로 시인하는 반면 민주당 인사들은 한결같이 부인으로 일관하고 있으니 어리둥절할 뿐이다.

정치권이 도청을 정쟁 대상으로만 접근하는 것은 잘못이다. 한나라당이 자료를 한꺼번에 공개하지 않고 추가 폭로를 예고하며 정부를 압박하는 모습은 볼썽사납다. 민주당이 극한 용어로 상대방 비난에 치중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진실을 밝혀 국민을 도청 공포에서 해방시키는 게 최선의 대선 득표 방법임을 두 정당은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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