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젊은 감독들 세계시장서도 경쟁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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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그의 명함에는 영문 이름(Tony Rayns)과 나란히 중국어·일본어 및 한글 발음(湯尼 雷恩/トニ レインズ/토니 레인즈)이 적혀 있다. 아시아영화 통(通)임을 자부하는 분위기가 느껴진다.

런던영화제와 캐나다 밴쿠버영화제의 프로그래머이자 '사이트 앤드 사운드'같은 유명 잡지에 기고하는 평론가이기도 한 토니 레인즈(사진)는 서양에 아시아영화를 알리는 중심적인 창구 역할을 해왔다. 특히 1990년대 이후 한국영화가 해외에 소개되는 데는 그의 공이 지대했고 96년 부산국제영화제가 태동할 때 결정적인 조언자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일각에서 한국영화의 해외채널이 지나치게 그에게 의존하지 않느냐는 우려가 나올 정도다.

중국 영화에 빠져 중국어를 배우기도 했던 레인즈는 이번 부산국제영화제 기간에도 아시아 감독들의 기자회견장에 꼬박꼬박 참석하는 등 열성적인 모습을 잃지 않았다. 부산영화제가 끝난 직후 현지에서 그를 만났다.

-유럽에서 아시아영화가 왜 주목받는가.

"80년대엔 중국영화,90년대엔 대만영화, 지금은 한국영화라는 식으로 아시아영화에 대한 관심이 변해왔다. 할리우드 영화는 10대 취향으로 흘러가고 유럽영화는 더 이상 흥미롭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 아시아영화는 새롭고 창의적이다"

-당신은 한국영화의 절대적인 지지자처럼 보인다. 정말 한국영화의 힘을 믿나.

"서울을 처음 방문한 게 88년이었다. 이 때만 해도 40년이상 지속된 권위적인 정부와 강력한 검열 제도의 영향으로 소재와 주제 등에서 많은 억압을 받고 있었다. 극장에도 할리우드 영화와 홍콩 영화 일색이었다. 그러나 지난 6,7년간 한국영화는 가장 흥미롭고 역동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90년대 초부터 정치·사회 분위기가 풀렸고 제작자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때마침 재능있는 젊은 감독들도 대거 등장했다. 지금 한국에는 세계에 내놓아도 처지지 않을 감독이 적지 않고 이들이야말로 한국영화의 힘이다."

-요즘 한국영화 위기설이 나오고 있다.

"산업적인 면에서 한국영화가 전환기에 있는 건 분명하다. 한국 영화계의 가장 큰 문제는 유능한 제작자가 없다는 점이다. 한국에는 서양에서 말하는 의미의 제작자, 즉 프로듀서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프로듀서라고 소개하는 이들을 만나보면 영화사 사장에 더 가깝다. 제작자(프로듀서)는 영화의 방향과 내용에 대해 감독과 대등한 관계에서 토론할 수 있어야 한다. 제작비를 짤 때도 적절한 규모를 세울 줄 알아야 하고 해외시장에서 어떤 영화가 통할지, 홍보는 어떻게 할지, 배급망은 어떻게 확보 할지 등 다방면에 능통해야 한다.

-대안제시가 필요할 듯하다.

"대안이란 문제점 지적에서 이미 나온 셈이다. 항상 해외 시장을 염두해 둬야 한다. 이를 위해 제작자는 외국 영화인과 두툼한 인맥도 만들 필요가 있다. 시간이 걸리지만 꼭 필요한 일이다. 2∼3년새 제작비 규모가 큰 영화가 과잉 생산됐다는 점에도 반성이 필요하다. 이런 영화는 국내 시장으로는 한계가 있어 수출에 기대야 한다. 하지만 한국의 큰 영화들은 외국에서 거의 먹히지 않는다. 아직 해외에서 인기있는 작품은 이창동·홍상수 같은 감독의 '작은 영화'들이다."

-근래 조폭코미디류가 흥행을 주도해 우려하기도 한다.

"관객이 좋아하고 수익이 창출된다면 누구도 그런 추세를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유럽·미국 같은 해외 시장을 고려한다면 이런 영화의 미래는 극히 회의적이다. 이들 지역의 관객에게는 조폭코미디류는 낡은 영화로 비치기 때문이다. 이 영화들이 한국에서 얼마나 긴 생명력을 가질지에 대해서도 솔직히 부정적이다."

부산=이영기 기자, 사진=송봉근 기자

leyok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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