反美사태 정부는 뭐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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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미국의 형사재판과 관련해서 법률지식이 없는 한국인들이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배심원제도와 과실치사 사건의 피고에 대한 무죄평결일 것이다. 한국의 법정에서는 판사가 형사피고인에 대한 유죄냐 무죄냐를 결정하는데 미국서는 판사가 아니라 일반인들로 구성된 배심원이 유죄냐 무죄냐를 평결한다.

과실치사 사건의 경우 한국에서는 일단 유죄판결을 내리되 집행유예로 실형(實刑)은 면제해 주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미국의 경우는 고의성이 없다고 판단되는 과실치사 사건은 무죄평결을 받는다. 의정부에서 2명의 여중생이 미군 장갑차에 압사한 사건의 피고인들인 미군병사들에게 내려진 무죄평결이 이런 경우다.

일반 한국인들에게 의정부사건의 무죄평결이 더욱 이해되지 않는 것은 배심원이 모두 미군들로 구성된 것이다. 미국의 군사재판에서는 배심원은 당연히 군인들로 구성되지만 그런 제도에 익숙하지 않은 한국인들은 초록은 동색(同色)인 군인배심원들이 공정한 평결을 할 수 없다고 처음부터 의심한다.

의정부사건 무죄평결에 대한 시민단체들의 잇따른 항의시위의 배경은 1차적으로는 한·미간의 이런 현격한 법감정 또는 법문화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시위가 점차 무죄평결 자체에 대한 항의에서 반미시위라는 넓고 높은 차원으로 발전하는 것이 걱정된다.

서울 시내 미국시설들이 화염병 공격을 받고, 일부 유흥업소들은 미군들의 출입을 금지하고, 일부 시민단체들은 백악관 앞 원정시위까지 계획하고 있다. 이런 일련의 사태가 미국인들에게는 전반적인 반미운동으로 비치는 것은 당연하다.

의정부사건에 대한 항의시위가 빠른 속도로 확산되는 저변에는 부시 정부의 대북 강경노선, 특히 악의 축 발언 같은 것들이 깔려 있다고 생각된다. 특히 젊은 층은 이 사건이 노근리 양민학살, 매향리 사격장, 미군기지의 유해물질 방류 등 일련의 사건들과 함께 한국인들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힌다는 인식을 갖는 것으로 보인다.

반미시위가 일어나도 좋은 시기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지금은 한·미관계가 후퇴를 허용하기에는 너무 민감한 시기다. 미국의 대북 강경정책을 배경으로 터진 북한 핵문제는 한반도사태를 어디로 몰고갈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다. 김대중 정부와 부시 정부의 매끄럽지 못한 관계 때문에 반미시위가 크게 확산될 때 한·미관계 자체가 충격을 받을 수도 있다. 지금의 두나라 정부에는 파국을 조정할 능력이 없어 보인다.

북한문제가 어느 정도 풀리면 한·미동맹관계는 새시대의 새질서에 맞게 개편될 수밖에 없다. 미국은 1990년에 이미 해외주둔 미군에 관한 넌-워너(Nunn-Warner)법에 따라서 상징적인 수준의 미군만을 한국에 주둔시키는 3단계 미군철수를 시작해 주한미군에서 7천명을 철수하고 평시작전권까지 한국군에 넘겼다.

주한미군의 3단계 철수계획이 예정대로 진행됐다면 지금쯤 한국에는 상징적인 수준의 미군만 남았을 것이다. 1993년에 일어난 북한 핵 위기가 이 철수계획을 중단시켰다. 그러나 계획 자체는 지금도 살아 있다. 주한미군의 대폭 감축은 한·미 동맹관계의 근본적인 개편을 의미한다.

한국과 미국의 법 감정의 차이가 촉발한 항의시위가 전반적인 반미운동으로 발전하고, 그것이 다시 북한문제 해결의 진전이나 북한 핵 위협의 정도와 상관 없이 넌-워너법의 실행과 한·미 동맹관계의 개편을 강요하는 사태는 위험하다. 주한미군 철수의 속도와 규모는 어디까지나 남북관계 개선에 따른 한반도 긴장완화의 정도와 한국의 자주국방의 능력에 따라 결정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의정부사건에 대한 항의시위에 침묵으로 일관하는 김대중 정부는 직무태만의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정부는 입장이 없는가. 할말이 없는가. 청와대 고위관리가 외국기자에게 항의시위를 하는 사람들은 반미감정을 부추기고 싶은 소수의 과격분자들이라고 말한 것은 무책임의 극치다.

정부는 자존심을 다친 한국인들에게 두나라 형사재판제도의 차이를 성의있게 설명하라. 행정협정(SOFA)의 재판관할권 부분을 다시 고칠 수 있는지, 한국과 미국 정부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입장을 밝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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