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 웃고 울리는 '여론조사의 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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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민주당 노무현 후보와 국민통합21 정몽준 대표간의 후보단일화 수단은 여론조사였다. 이제 여론조사는 정치판단의 보조수단에서 벗어나 현실 정치를 직접 결정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한편에선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여론조사가 갖는 한계를 지적하며 여론조사에 대한 맹신(盲信)은 자칫 여론의 왜곡을 가져온다는 비판이 있다.

◇맹위 떨치는 여론조사=우리 정치에 여론조사가 본격 도입된 계기는 1987년 대선이다. 당시 한국갤럽은 선거결과 예측조사를 실시해 민정당 노태우(盧泰愚)후보의 당선을 실제 결과와 2.2%포인트 차이로 맞췄다. 그 때는 선거여론조사가 불법이었으나 결과가 집권당에 유리했기 때문에 별다른 제재가 없었다.

선거법 개정으로 여론조사가 가능해진 92년 대선부터 여론조사는 활성화됐다. 당시 여론조사기관에선 선거 두달여를 앞두고 6차례에 걸쳐 후보자별 지지도 변화 추이를 조사했다. 결과는 줄곧 민자당 김영삼(金泳三)후보가 민주당 김대중(金大中)후보를 6∼9%포인트 정도 리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득표는 김영삼 후보 42%, 김대중 후보 33.8%. 여론조사가 정치권의 신뢰를 얻는 결정적 고비였다.

97년 대선부터는 여론조사 때문에 선거구도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해 8월 신한국당 이회창(李會昌)후보의 아들 병역의혹이 제기되면서 李후보의 지지율이 10%대로 급락하자 당내에선 후보 교체론이 터져나왔다. 이는 이인제 (李仁濟)경기지사의 탈당으로 이어졌다. 11월 이회창 후보가 급상승세를 타자 후보교체론은 쑥 들어가고 이번엔 이인제 후보가 사퇴해야 한다는 주장이 당 안팎에서 제기됐다.

자민련 김종필(金鍾泌)총재나 조순(趙淳) 민주당 총재가 중도에서 레이스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여론조사 때문이었다. 대선 당일 MBC와 한국갤럽은 투표가 끝나자마자 김대중 후보의 1%포인트차 당선을 예상해 큰 화제가 됐다.

이번 대선도 여론조사는 민주당 경선과정에서 이인제(李仁濟)의원의 몰락, 노무현(盧武鉉)돌풍, 박근혜(朴槿惠)의원의 부상과 정몽준(鄭夢準)돌풍이라는 '정치현상'을 만들어냈다.

◇여론조사의 허와 실=그러나 여론조사가 언제나 적중한 것만은 아니었다. 표본의 모집단이 큰 대선에선 비교적 정확하지만 선거구가 2백여개로 쪼개지는 국회의원 총선에선 걸핏하면 헛발질을 했다. 96년 15대 총선 출구조사에서 신한국당의 압승을 예측했다가 과반수 미달로 나타나면서 여론조사기관들은 망신을 당했다.

2000년 16대 총선 출구조사에서도 비슷한 실패를 반복했다. 각 조사기관은 선거 직후 일제히 민주당이 지역구에서 1백7∼1백12석을 얻어 95~1백석을 얻는 한나라당을 이길 것이라고 예측했다. 결과는 한나라당 1백12석, 민주당 96석이었다. 98년 지방선거 때도 부산시장 선거 예측이 결과와 뒤바뀌었다.

여론조사 전문가들은 "야당 지지자들이 속내를 잘 터놓지 않는 우리 정치문화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같은 한국적 상황을 해결할 대책이 마땅치 않다. 게다가 여론조사는 투표율을 반영할 수 없기 때문에 투표율이 낮아질 경우엔 조사가 빗나가게 마련이다.

지난 24일 盧·鄭후보 단일화 조사에서도 '리서치 앤 리서치'에선 盧후보 46.8%대 鄭대표 42.2%가 나왔으나, '월드리서치'에선 盧후보 38.8%대 鄭대표 37.0%의 결과가 나왔다. 이렇게 수치가 다른 이유는 설문문항과 조사설계가 똑같았으나 양기관 조사원들의 숙련도가 달랐기 때문이라고 한다.

리서치 앤 리서치의 노규형 사장은 "여론조사는 하나의 게임의 룰로서 양측이 도입한 것이지 조사결과 자체를 절대시해선 곤란하다"고 말했다.

국내 여론조사기관이 주로 이용하는 표본추출과정도 문제가 있다. 주로 전화번호부를 이용해 샘플을 뽑는데 조사시간에 전화를 받기 어려운 계층의 사람들은 조사에 포함시킬 방법이 없다.

선진국은 처음 뽑힌 샘플과 수차례 재통화를 시도한다. 때문에 조사완료에 5∼7일 정도가 소요되지만, 우리나라에선 비용 때문에 한번 통화가 안되면 바로 다음 전화번호로 넘어가는 방식이다.

숙명여대 이남영(李南永)교수는 "정치권이 너무 승리에 집착하다 보니 여론조사에 일희일비하고 있다"면서 "이번에 盧·鄭 후보 단일화를 여론조사를 통해 한 것도 결과에만 집착하다 보니 민주주의의 핵심인 절차적 정당성이 무시된 결과"라고 말했다.

김정하 기자

wormhol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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