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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사진신부'의 딸 앨리스 김]"하와이서 태어나고 살았지만 난 한국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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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1백3명의 한국인이 증기선 갤릭호를 타고 제물포항을 떠나 3주 간의 긴 여정 끝에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1903년 1월 13일. 미주 한인 1백년 이민사의 첫 페이지가 열리는 순간이었다. 드넓게 펼쳐진 사탕수수밭 앞에서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앞으로 다가올 역경을 예감하며 한숨 지었을까, 아니면 마냥 희망에 부풀어 기뻐했을까.

하와이 이민의 여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쪽빛 바다와 푸른 하늘이 눈을 지치게 할 만큼 아름다운 풍경을 지녔어도 하와이는 결국 이국의 땅이 아닌가. 이민 초기 남자가 다수였던 이민자들에게 가장 큰 애로 중 하나는 바로 신부 구하기였다. 여인네가 없어 안달하던 이민자들은 급기야 '신부 구함'이란 광고를 한국 신문에 내게 된다. 그것이 효과를 발휘했던지 1910년부터 하와이엔 '사진신부'의 물결이 이어진다. 사진신부란 사진만 보고 결혼을 결정하고 하와이로 건너왔던 여인들을 말한다.

지난해 10월 하와이의 마지막 사진신부였던 유분조 할머니가 1백1세로 세상을 떠났다. 하와이 이민 1세대 시대가 막을 내린 것이다.

1백세 생일상을 건강한 모습으로 받으며 하와이 이민사의 상징적인 인물로 존경받아왔던 유분조 할머니. 그의 외동딸인 앨리스 김(74)을 최근 호놀룰루에서 만나 할머니와 하와이 이민 2세대인 그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의미있는 한 가족사를 통해 이민 1백년의 단면을 읽어본다.

화려한 옷차림의 관광객들로 넘쳐나는 와이키키 거리에서 승용차로 10분쯤 가면 단층 주택이 바둑판처럼 늘어선 카이무이키 9번가가 나온다. 행인들의 발걸음이 뜸한 일요일 오전 앨리스 김의 집을 찾았다. 자그마한 정원을 지나 현관문을 여니 아주 널찍한 거실이 눈에 들어온다. 앨리스 김은 교회를 막 다녀온 참이었다.

하얀 면 티셔츠를 입은 앨리스 김과 반바지 차림의 남편 헨리 순택 김(76)이 기자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런데 이들이 할머니·할아버지 커플 맞아? 옷차림도 옷차림이지만 고희를 넘은 나이 탓에 허리가 구부정할 테고 얼굴엔 주름이 쪼글쪼글하지 않을까 하는 선입견은 여지없이 깨져버렸다. 정말 60대, 아니 50대라고 해도 믿을 만큼 젊고 맑은 얼굴이었다.

"고생을 했어야 늙지. 한평생 얼마나 행복하게 살았다고. 처음 이민 온 우리 부모들이 정말 힘들게 살았지. 우리야 뭐 힘들 게 있었나. "

아버지는 사탕수수 노동자

순탄치만은 않았을 삶에 대해 물었더니 뜻밖에 "행복했다"고 답변했다. 그러더니 대뜸 "아침은 먹었어요?"라고 되물었다. "아니요"라고 했더니 그럼 인터뷰고 뭐고 좀 먹고 하잔다. 젊은 사람이 끼니를 거르면 안된다고 했다. 이내 부엌으로 가더니 과일과 케이크를 내왔다. "많이 먹어요. 밥도 안 먹고 일을 하면 어떡하나. " 인터뷰는 잠시 중단됐다.

그는 마치 오랜만에 손아래 지인이 놀러온 듯 편하고 따뜻하게 대해줬다. 하와이 한인들이 가진 인심의 한자락이다.

앨리스 김은 호놀룰루가 있는 오하우섬 아래쪽 마우이섬에서 사탕수수 노동자인 아버지 유도봉(69년 작고)씨와 유분조씨의 4남1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이후 빅아일랜드 힐로에서 살다 41년 호놀룰루로 건너왔다. 어머니의 높은 교육열에 힘입어 앨리스 김은 하와이 세인트 프랜시스대 간호학과를 졸업했다.

"어머니의 교육열은 대단했지요. 그 옛날에 자식 다섯을 모두 대학에 보냈으니까요. 초기 하와이 이민자들은 다 그랬어요. "

대학 졸업 후 50년간 세인트 프랜시스 병원 등 하와이 주요 병원에서 간호사로 활동하다 4년 전 은퇴했다. 하지만 요즘도 1주일에 한차례 카풀라니 메디컬센터에서 자원봉사를 한다. 하와이 한인들, 특히 앨리스 김에게 자원봉사는 거의 생활이나 다름없다. 평생 한결같이 자원봉사하는 데 일정한 시간을 냈다.

"어머니는 항상 남을 돕는 사람이었어요. 저희들에게도 항상 남을 도우라 하셨죠. 뭔가를 베푸는 사람이 복을 받는다는 거예요. 저도 제가 가진 것은 모두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51년 교회에서 만나 결혼한 남편은 호놀룰루 소방국에서 근무하다 은퇴했다. 슬하에 아들만 넷을 두었고 손자는 열명이다. 유분조 할머니의 다섯 자녀 중 한국인과 결혼한 것은 앨리스 김이 유일하다.

"혹시 아드님들도 한국 여자와 결혼했습니까. "

"아니, 아니. " 손사래를 친다. 다소 불만스러운듯 했지만 곧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고 했다. 네 아들 모두 일본·중국계 여자와 결혼했다.

"한국 며느리를 원했지요. 그런데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되나요. 특히 어머니가 많이 말렸어요. '자식은 뜻대로 안된다. 강요하지 말아라'면서요. 하지만 지금은 다들 만족스러워 해요. 하와이에선 여러 민족이 어울려 살기 때문에 혼혈이 아주 자연스럽지요. "

내놓은 과일을 먹으며 도란도란 얘기가 익어갔다. 그런데 대답마다 빠지지 않는 인물이 그의 어머니였다. 유분조 할머니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궁금해졌다.

1900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난 유분조 할머니는 열아홉살 때 사진신부로 하와이에 왔다. 남편 유도봉씨는 할머니보다 23세 연상이었다. 사탕수수밭 노동자였던 남편은 점잖은 성품을 지녔고 항상 "내가 자네를 여기까지 불러서 고생을 시킨다"며 아내를 가엾게 여겼다고 한다.

한약방을 운영하는 아버지 밑에서 티없이 자란 할머니는 하와이에 오기 전엔 고생이라고는 모르는 처녀였다. 하와이에 와서도 남편이 건강할 때엔 괜찮았다. 하지만 막내를 낳은 후 남편은 결핵으로 몸져누웠고 그 때부터 병 수발과 자식 키우기는 할머니 몫이었다. 할머니는 일당 1달러25센트를 받고 매일 수십명에 달하는 노동자들의 옷을 빠느라 손의 허물이 모두 벗겨졌다. 삯바느질과 남의 집 청소도 해야 했다. 그런 가운데도 5남매를 모두 대학에 보냈다.

"어머니는 매우 강한 사람이었지. 교회에 굉장히 열심히 다니셨고. 타고나기를 몸도 마음도 건강하신 분이었어. 매사에 싫어하는 것이 없었고 매우 긍정적이었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빨래에 지쳐 있을 때 내가 도와드리곤 했는데…. "

할머니의 증손자, 즉 앨리스 김의 손자 더글러스 김이 학교 숙제로 써 간 '우리 가족의 역사'엔 유분조 할머니에 대한 재미있는 일화 한 대목이 나온다.

"할머니는 시집 오기 전 한국에서 할아버지의 사진을 보고 행복했대요. 할아버지가 키도 크고 잘 생겨서 친구들에게 자랑을 했다지요. 몇날 며칠 배를 타고 할머니가 하와이에 도착했어요. 그 무렵 긴 여행 탓에 할머니는 초주검 상태였죠. 할아버지 얼굴을 제대로 볼 틈도 없었대요. 도착 다음날 마우이섬에 해가 뜰 때 처음 할아버지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지요. 그런데 그 순간 할아버지가 너무너무 늙어보이더래요. 할머니는 속이 상해 엉엉 울었대요. "

뒤늦게 한국말 배우기 시작

유분조 할머니는 2001년 초 뇌졸중으로 쓰러지기 전까지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정정했다. 앨리스 김은 "정신은 저보다 훨씬 더 맑았어요. 손자 17명과 증손자 20명의 이름은 물론 나이까지 기억하고 있었으니까요. "

하지만 할머니는 지난해 10월 26일 외동딸의 지극한 보살핌에도 불구하고 끝내 눈을 감았다. 앨리스 김은 요즘 한국말을 배우고 있다. 조금 할 수 있는 한국말도 반말이 고작이다. 기자에게도 "몇 살이야" "밥 먹었어" 정도만 한국말로 했다. 유분조 할머니는 그의 반말투를 '나쁜 말'이라고 했다.

젊었을 때 어머니가 우리말을 가르치려 했지만 결국 포기했다. 그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금 새삼 한국말을 배우겠다고 한국 친구를 매주 만나는 이유는 뭘까.

"배워야지요. 끝까지 모르고 갈 수는 없잖아요. 여기서 태어나 이곳 방식으로 살았지만 전 순 한국인이에요. 한국 여자지요. "

한국엔 친지나 친구를 만나러 네 차례 온 적이 있다는 그에게 "한국에서 살고 싶지 않으냐"고 물었다. 새삼 한국이 그리워진다면 그럴 듯도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답은 의외였다.

"한국에 가봤는데 빈부의 차가 너무 큰 것 같더라고요. 돈을 많이 벌 자신이 있으면 또 모르지. "

그래도 한국인의 핏줄을 이어가고 싶은 마음은 가득했다. 김이라는 성도 평생 가지고 살았고 손자들에게 꼭 할머니라 부르도록 한다. 그래도 그걸 손자들에게 지나치게 강요할 수는 없다고 했다. 이민족 며느리를 맞이했기 때문이다. 이건 고향을 떠나 3대, 4대까지 핏줄을 이어간 민족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애환이 아닐까.

"새해엔 할머니가 가신 지도 꽤 되고 하니까 다 불러 모아 떡국을 끓여 보려고 해요. 산적도 만들고 약밥도 해서 나눠줘야죠. 한국 음식 만드는 것을 자식들에게 보여주는 것 정도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

문 밖까지 나와 잘 가라고 인사하는 그를 뒤로 하고 나왔다. 하와이 햇살은 여전히 눈부셨다. 이 빛을 받으며 살아온 그를 다시 생각했다. 햇살만큼 눈부신 삶은 아니지만 흐뭇한 미소를 안겨줄 만한 인생. 앨리스가 "평생 행복했다"고 한 그 말에 기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호놀룰루=신용호 기자

nova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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