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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北京의 인사동 … 北學派 정신적 고향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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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굳이 '신연행록'을 위해서가 아니라 해도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 베이징(北京)에 갔다면 모름지기 제일 먼저 달려갈 곳은 유리창(琉璃廠)이다. 우리 답사단 역시 베이징에 도착하자마자 호텔에 여장을 풀기도 전에 유리창으로 향했다.

베이징 시내 서쪽 편에 있는 유리창은 서울로 치면 인사동 같은 곳으로 고미술상, 고서점, 지필묵을 파는 화방(畵房)들이 즐비하다. 명나라 초 자금성을 지을 때 유약을 바른 기와, 즉 유리(琉璃) 기와를 제조하는 공장이 생기면서 유리창이라는 이름이 생겼고, 자금성이 완공된 다음 공장이 문을 닫게되자 그 큰 빈 집에 서적상들이 들어서면서 홀연히 문화의 거리로 바뀐 것이었다. 마치 뉴욕 맨해튼 남쪽 공장 창고들이 떠난 자리에 화랑들이 들어와 소호(SoHo)거리를 만들어낸 것과 같은 문화변동이었다.

18세기 청나라 건륭제 시절은 유리창의 전성시대였다. 건륭제가 '사고전서(四庫全書)' 편찬을 위해 각종 서적을 닥치는대로 모을 때 유리창에는 강남에서 오는 '산더미 같은' 책을 사고 파는 서점들이 '이빨을 나란히 하듯' 붙어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유리창 주위에는 학자·예술인들의 집들이 속속 들어서면서 명실공히 학예의 거리로 됐다. 청나라의 대표적인 유학자인 손성연(孫星衍)의 집도 여기 있었고, 양주팔괴(揚州八怪)의 한 분인 나양봉(羅兩峯)도 유리창 가까이 있는 관음사에 기거하고 있었다. 박제가(朴濟家)가 이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연유였다.

바로 이때 우리의 북학파 학자들의 연행(燕行)과 유리창 출입이 이어졌던 것이다. 유리창을 통한 한·중문화 교류의 본격적인 출발은 홍대용(洪大容)과 엄성(嚴誠)·반정균(潘庭均)의 드라마틱한 만남에서 시작되었다. 1766년 2월 어느날 홍대용은 이기성(李基成)과 함께 유리창에 갔다가 한 만물상(萬物商: 잡화점)에서 멋진 안경을 끼고 있는 신사 두 명을 만났다. 이들은 부드러운 눈으로 보다가 불쑥 "그런 안경은 어디 가면 살 수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신사는 "하필이면 산다고 하십니까" 하고는 선뜻 자기 안경을 벗어주었다. 이들은 사례라도 하고자 했으나 신사는 한사코 뿌리치고 유유히 떠났다. 그 두 사람이 바로 강남의 학자 엄성과 반정균이었다.

이리하여 홍대용과 이기성은 그들의 여관으로 찾아가 감사의 뜻을 전하고, 이를 계기로 사흘이 멀다하고 만나 시를 짓고 학문을 논하였다. 홍대용은 그 때의 만남을 "한두 번 만나자 곧 옛 친구 같아 마음이 기울고 창자를 쏟아 형님, 아우 같았다"고 했다.

그후 엄성은 갑자기 학질에 걸려 세상을 떠났는데 마지막 눈을 감는 순간까지도 홍대용이 써준 이별의 시를 가슴에 안고 있었다고 해서 중국 지식인 사회에서 두 사람의 깊은 우정은 아름다운 일화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반정균은 훗날 큰 학자가 돼 우리나라 규장각 4검서의 시집인 『사가시집(四家詩集)』이 연경에서 출간될 때 그 서문을 쓰게 된다.

우리는 유리창에서 그 만물상이 어디였을까 추측해 보았는데 김태준 교수는 목판수인(木板水印) 복제품과 문방구 판매로 유명한 영보재(榮寶齋) 부근으로 추정했다.

홍대용이 귀국후 쓴 '연행록'은 신진학자들에게 큰 감동과 충격을 주었다. 박제가는 "밥먹던 숟가락질을 잊기도 했고, 읽고 웃다가 밥알이 튀어나오도록" 재미있었다고 했다. 홍대용 연행 후 13년이 지난 1778년엔 이덕무와 박제가가 연경에 가서 유리창을 뒤지며 다녔고, 그로부터 2년 뒤 박지원은 열하까지 다녀와 『열하일기(熱河日記)』를 펴냈으며, 그후 10년 뒤에는 박제가와 유득공이 또 연경에 갔다.

조선의 연행학자들이 유리창을 무시로 드나들게된 데에는 정조대왕의 열정적인 학예진흥정책에 힘입은 바가 컸다. 1776년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규장각을 세워 학술자료를 모으게 하며 사은부사로 떠나는 서호수(徐浩修)에게 '흠정고금도서집성(欽定古今圖書集成)'을 구해오라고 명했다.

이 책은 강희제 때 시작해 옹정연간까지 근 50년간에 걸쳐 완성한 미증유의 총서(叢書)로 분량이 1만 권이나 된다. 서호수는 이 희귀본을 구하려고 유리창을 뒤지다 결국은 한림원에 뇌물을 진탕 주고 동활자 초인본을 구해 몇 수레에 나누어 싣고 왔다. 이런 것을 범법행위라고 해야할까 학문적 열정이라고 해야할까.

아무튼 정조는 이 책의 장정을 잘 고쳐 창덕궁 규장각의 개유와(皆有窩)에 소장케 했다. '개유와'란 '모든 게 다 있는 집'이라는 뜻이니 당시 학예진흥의 분위기를 알 만한 일이며, 우리시대엔 언제나 이런 진짜 '문화 대통령'이 나올 수 있을지 안타까움을 더하게 한다.

유리창 비화 중 우리의 민족적 자존심을 드날린 것은 유득공의 민족대서사시 '21도 회고시(二十一都懷顧詩)' 이야기다. 단군의 왕검성부터 마한의 금마, 가야의 김해 등 한국 역사상 왕도(王都) 21곳을 읊은 유득공의 이 영사시(詠史詩)는 중국학자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고 서로 갖고 싶어했다.

유득공은 이 시집을 당시 '사고전서' 편집 총책임자인 기윤(紀?)에게 선물했고, 나양봉은 그것을 정성스레 베껴 간직했다고 한다. 그후 유득공의 자필본 '21도회고시'는 계속 옹방강(翁方綱), 섭지선(葉志詵), 조지겸(趙之謙)의 손에 넘어가 결국 중국에서 먼저 책으로 간행됐고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것은 1934년의 일이었다.

세상만사가 일한 만큼 거두어들인다고 할 때 18세기 연행학자들의 열정적인 신지식 수용은 결국 정조시대의 빛나는 문예부흥을 이룩케 하고 다음 시대엔 추사 김정희 같은 영민한 인물의 등장으로 국제적 지평에서 한 치 꿀림없는 학예의 교류와 창달을 가능케 했던 것이다. 유리창은 이처럼 연행학자들의 눈부신 학예 교류가 서려 있는 한국문화사의 한 현장인 것이다.

나는 유리창에 갈 때마다 우리 선학들의 학문적 열정을 기림과 동시에 두 분의 이국인(異國人)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한 분은 유리창 오류서점(梧柳書店) 주인인 도정상(陶正祥)으로 그는 조선의 연행학자들에게 친절하게 정보를 제공해준 것으로 유명하다. 또 한 분은 일본인 후지쓰카 린(藤塚)으로 유리창을 통한 한·중 학예교류의 실상은 그의 치밀하고도 집요한 연구결과로 밝혀진 것으로 그가 도쿄(東京)대 철학 박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한 것이 바로 '조선조에서 청조문화의 이입(移入)과 김완당(金阮堂)'이었다.

이에 비할 때 나라는 존재는 무엇이던가. 유리창의 영보재와 고금도서당(古今圖書堂)의 진열장이나 기웃거리다 몇 권의 책과 목판수인 두어 장을 사들고 유리창을 떠나는 내 모습이 스스로 생각하기에 너무도 초라하게만 느껴졌다.

유홍준 교수

<명지대·미술사·>

국제한국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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