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여성]女性과학자 5000년史 : 편견 뛰어넘어 더 돋보이는 족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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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24면

피타고라스가 활약하던 옛 그리스는 여성 과학자들의 천국이었다. 차별이 없었을 뿐 아니라 학파를 이끌던 여성들이 기록에 심심찮게 거론될 정도였다. 그러나 중세를 지나 근대에 이르기까지 여성 과학자들은 편견에 맞서 악전고투해야만 했다. 유명한 퀴리 부인도 예외는 아니었다. 고대 이집트에서 현대까지 5천년 과학사에 이름을 남긴 여성 과학자들을 알아 본다.

편집자

여성 과학자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투탕카멘의 묘가 발견된 이집트 '왕가의 골짜기'에 있다. 이곳의 한 무덤에 기원전 2천7백년께 살았던 '메릿 프타'라는 여성의 초상화와, 그가 '의학자의 우두머리'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는 당시 의학자로서 치료 효능이 있는 여러가지 화합물을 만들어 실험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실제 약 4천년 전의 파피루스에는 어떤 화합물을 바르면 눈병에 걸리지 않는다는 얘기가 남아 있어 고대 이집트에서 의학 연구가 꽤 활발했음을 짐작케 한다.

과학사에 등장하는 두번째 여성은 엔 헤두 아나. 기원전 2천3백년께 살았던 그는 중동에 자리한 고대 아카디아 제국의 여 제사장이었다. 신전마다 천문 관측소를 만들게 했으며, 현재같은 각도의 단위(1도=60분, 1분=60초)와 음력을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수학과 과학이 발달했던 기원전 6백∼3백년께의 그리스는 여성 과학자의 황금기였다. 여성들은 수학·과학을 가르치는 학교에서 교사나 연구자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인물이 수학자였던 테노다. 그는 남편 피타고라스가 사망한 뒤 피타고라스 학파를 이끌기도 했다. 오늘날 '황금비'라 불리는,미적으로 가장 아름다움을 느낀다는 가로·세로 비율은 바로 테노가 만들어 낸 것이다.

이집트의 히파티아(370∼415)야말로 고대의 가장 위대한 여성 과학자라는 데 이의를 다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는 학문의 보고(寶庫)라 불리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학교에서 수학과 천문학을 가르쳤다. 히파티아는 천체관측기를 비롯해 증류수를 만드는 장치와 액체의 밀도를 측정하는 기기 등을 발명했다.

중세의 과학은 자연에 담긴 신의 뜻을 이해하기 위한 학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많은 과학의 발전이 수도원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독일의 수녀원장이었던 힐데가르트(1099∼1179)는 치료에 어떤 효험이 있는 지를 알아내려 많은 동·식물을 관찰하고 이에 대한 책들을 남겼다. 힐데가르트로 인해 비로소 과학이 동·식물에 눈을 돌렸고, 그 결과 근대적인 생물학이 싹트게 됐다.

15세기 이후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 일어나며 사회는 한단계 발전했지만 여성 과학에는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수도원들은 문을 닫았고, 대학에서는 철저히 남성 위주의 교육·연구가 이뤄졌으며, 심지어는 여성 과학자들이 마녀 사냥에 희생되기까지 했다. 이런 암흑기를 뚫고 우뚝선 사람이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로라 바시(1711∼1778)다. 어린 시절 그를 가르치며 탁월한 재능을 알아본 스승 타코니가 강력히 추천해 바시는 21세에 볼로냐대 교수가 됐다.

유럽의 대학에서 여성이 교수가 된 것은 그가 처음이다. 바시는 볼로냐 대에서 남자들도 위험하다고 꺼리던 전기실험 등을 하며 수많은 논문을 남겼고, 갈바니·볼타 등 우리나라 고교 교과서에도 이름을 남긴 훌륭한 과학자들을 제자로 키워냈다.

독일 태생의 천문학자 카롤린 허셸은 온갖 역경을 뚫고 이름을 날린 경우다. 그는 오빠가 천문학을 공부하는 영국으로 가겠다고 했지만,부모가 반대했다. 결국 부모가 하녀를 부릴 수 있도록 오빠가 돈을 댄다는 조건을 달고 영국으로 건너가 오빠의 조수로 일했다. 허셸은 오빠가 여행간 틈에 우주를 관찰해 14개의 성운과 8개의 혜성을 발견했다.

이밖에도 많은 여성 과학자들이 활약했지만, 사실 근세의 여성 과학자들은 많은 차별을 받았다.

노벨상을 두번이나 받은 퀴리 (1867∼1934)부인도 마찬가지였다. 노벨상을 받고도 강단에 서지는 못하다가 남편 사망 뒤에야 그 자리를 이어받아 소르본대 교수가 됐다. 또한 그는 평생 과학아카데미 회원으로 뽑히지도 못했다. 한차례 그 후보에는 올랐지만, 남성의 두터운 편견에 부닥쳐 좌절됐다.

그나마 퀴리 부인에게는 헌신적인 가족들의 도움이 있었다. 남편 피에르 퀴리는 부인이 파고 들었던 방사능 분야를 연구하기 위해 자신의 전기 관련 연구를 접었다. 또 시아버지 유진 퀴리는 퀴리 부인이 연구에 열중할 수 있도록 묵묵히 손주들을 키우고 돌봤다.

독일의 여성 물리학자 리제 마이트너(1878∼1968)는 남성 공동 연구자만 노벨상을 수상하는 불이익을 받기도 했다.

권혁주 기자

woong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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