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측 무력화한 선거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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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우리의 대통령 선거에서는 언제나 막바지에 이르러 깜짝 놀랄 만한 일이 벌어지곤 했는데, 이번에도 예외는 아닌 듯하다. 이회창 후보에게 뒤지고 있는 노무현·정몽준 두 후보가 일반적인 예측을 뒤엎고 후보 단일화를 추진하기로 합의함으로써 많은 이들을 놀라게 하고 있다. 두 후보의 개인적인 성향, 지지 기반, 정책적 입장들을 고려할 때 이들의 단일화는 지극히 어려운 것으로 보였는데 지난 주말의 합의는 이러한 예측을 무력화시키는 깜짝 이벤트였다.

두 후보의 단일화가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이번 대선의 경쟁 구도는 근본적으로 변화해 그동안 느긋했던 한나라당 후보와 새로운 단일후보가 예측불허의 대결을 펼치게 될 것이다. 이에 따라서 그동안 별다른 쟁점 없이 시간만 보내는, 미국 코미디의 이름을 따서 사인펠트 선거(Seinfeld election)라고 불리던 이번 선거는 다시 팽팽한 대결로 돌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후보 단일화 추진이 12월 선거에 긴장감을 불러오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동시에 우리의 대통령 선거가 안고 있는 구조적 취약성을 다시 한번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첫째, 이번 단일화 논의는 우리 선거정치 과정의 제도화가 아직도 심각한 저발전 상태에 머물고 있음을 보여준다. 제도화란 헌팅턴 교수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일련의 절차가 안정적으로 반복됨으로써 행위자들 사이에 그 절차에 기반한 합리적 예측과 행동이 가능해지고 그에 따라서 궁극적으로 체제 전체가 안정을 찾아가는 과정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번 노무현·정몽준 두 후보의 단일화 추진과정을 보면 제도화의 핵심인 절차에 대한 존경심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먼저 민주당 노무현 후보의 경우 그는 대다수 전문가들이 한국 정당정치의 역사적 개혁으로 꼽고 있는 국민경선제를 통해서 1백80만명의 유권자들이 참여해서 선출한 국민경선 후보다. 따라서 노 후보의 대통령 선거 출마는 단지 노 후보 개인과 측근들의 결정에 따른 것이 아니라 경선에 참여했던 1백80만 유권자와의 계약을 통해서 성립한 것이다. 따라서 그의 출마 형태가 변경되기 위해서는 1백80만 경선참여 유권자들에 대한 설득과 이들의 추인이 필수적인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상황을 보면 노 후보의 설득의 주요 대상은 경선 참여 유권자들이 아니라 정몽준 후보였던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노무현 후보와 함께 단일화를 추진하고 있는 정몽준 후보의 출마 성격을 들여다보면 절차의 문제는 더욱 복잡하다. 정몽준 후보는 정당이 지명한 후보라기 보다는 스스로 대통령 선거에 나선 자기지명(self-nomination) 후보다. 그런데 국민경선을 거쳐서 선출된 후보가 별다른 정당정치의 기반이 없는 독립후보와 함께 단일화추진에 나서는 것은 민주당의 정체성, 당내 민주주의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비쳐질 수밖에 없다.

단일화 논의가 보여주는 또 다른 한국선거의 문제는 이념과 정책의 실종이다. 의원내각제 하에서 정당들 간의 연립이 일상화돼 있는 서유럽 민주주의에서 정당연립의 가장 일차적인 조건으로 꼽히는 것은 이념적인 근접도다. 세계관이 비슷하고 권력을 통해서 추구하고자 하는 이상이 서로 공존 가능할 때에 비로소 연립은 가능하고 또한 바람직하다.

그러나 세 명의 주요 후보들 가운데 가장 진보적인 생각과 배경을 지닌 노무현 후보와 가장 보수적일 수 있는 정몽준 후보가 연합을 형성한다는 것은 한국의 선거정치에서 이념과 정책이 갖는 위치가 얼마나 초라한지를 보여줄 따름이다.

어제 아침부터 노·정 두 후보 측은 단일화를 위한 여론조사 방법을 둘러싸고 이견을 조정하는 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두 후보가 내세우는 '정치혁명'에 다가가기 위해서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정교한 여론조사 방법이 아니다. 우리 국민들은 두 후보에게서 절차에 대한 존경심과 정책, 이념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고민하고 이를 바탕으로 유권자를 설득하는 모습을 더욱 간절히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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