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TV토론의 '흥행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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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우리에게 토론 문화가 없다고 비판하던 정치인들이 '토론'의 문화 토양을 만들지 못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다. 이번 정기국회에 제출된 정치개혁안 중 일문일답식 정책토론을 할 수 있도록 한 국회법 개정안도 물거품으로 사라졌다. 한나라당과 민주당 의원들이 온몸으로 거부했다.

의원들이 국회에서 정부 정책을 비판하고 좋은 대안이 나오도록 유도하는 데 일문일답식 토론이 안성맞춤이라는 데 모두들 동의했다. 입법부가 행정부를 강력히 제동 걸수 있는 유효 수단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의원들은 정책 질문을 통해 자신들의 짧은 밑천이 드러날까봐 겁먹고 있었다.

현재 국회에서 하는 의원들의 대정부 질문이란 사실상 정치연설이다. 근거 없는 정치공세와 폭로로 가득 찼으며 소속 당 대표에 아부하기 위한 연설 기회로 활용된다는 비판도 받았다. 오죽했으면 박관용 국회의장이 대정부 질문 형식을 바꾸자며 직접 개선안을 제안했을까를 생각하면 우리 정치인들의 한심한 토론 수준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일문일답식 대정부 질문은 정부 통제나 정보수집 못지 않게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는 기능을 갖는다. 그런데도 정치인들은 토론을 두려워한다.

우리의 토론 기피 현상은 대선 후보 TV 프로그램에서도 역력하다. 끈적끈적함도, 박진감도 없고 정보도 단순하다. 천편일률적인 질문과 답변이 거듭되는 건성 토론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대선 후보 단일화를 위한 민주당 노무현 후보와 국민통합21 정몽준 후보의 승부처가 TV 토론으로 결정됐고 또 두 후보 가운데 한 사람이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와 TV 합동 토론을 갖게 돼 선거방송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국민들을 대선에 적극 참여시키는 흥행의 성공 여부에 눈길이 쏠리고 있다.

지금까지 대선 토론이 평균 5%대의 낮은 시청률을 기록한 이유는 각 후보들을 에워싸고 있는 정치집단과 방송사들이 시청자들의 수준을 무시한 지적 비하(卑下)에 있다. 세계 최고·최강의 인터넷 인구와 많은 신문구독 그리고 정치에 대한 높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국민들이 TV토론을 외면하게 만들었다. 시청자들은 같은 밥에 같은 반찬만 나오는 프로그램에 식상했다. 새로운 메뉴와 다양한 정치요리 정보가 태부족했다. 국민들의 식성이 까다로워졌고 눈도 높아졌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대선 TV 프로그램도 일문일답식 토론이 가능해야 한다. 이를 통해 각 후보들의 신선하고도 소신 있는 공약에 박수를 보내고 장밋빛 포장의 황당한 공약과 그 허구성에 비판을 가해야 한다. 국민들은 그들의 리더를 선출하는 데 치밀하고도 최선의 정보를 제공 받을 권리가 있다. 경제계에선 기업들의 구체적인 경영 내용 공시가 의무화돼 있다. 투자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국민을 위한 정치에서 '국민을 위한 공약'이 실행 가능한 것인지 또는 그 전략의 대강이 어떤 것인지 국민은 알아야 한다. 패널리스트 선정과 사회자 진행 방식의 공정성을 놓고 방송사와 각 정당간의 마찰이 이어지면서 TV토론은 더욱 맹탕이 돼 왔다. 이런저런 비난과 시비를 겪느니 차라리 '모두가 공평하게-'하는 방식을 택하다 보니 결국 '토론' 없는 방송이 되고 말았다.

모든 방송사가 공정성에 의심을 받고 있고 모든 정당이 소속 후보의 지지율 하락을 용납하지 않는 분위기에서 국민에게 유익한 대선 토론이 가능할까. 이런 불신 속에서 해결책은 없다. 그러나 단 한가지. 각 정당과 정부의 보이지 않는 '압력'을 배제하고 자율적으로 공정성을 담보할 수 있는 절차를 마련하도록 방송사에 맡겨야 한다. 그 토론이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는 재미있는 프로그램이라면 특정 후보의 이해와 관계 없이 높이 평가해줘야 한다. 공정성은 결국 국민의 감시를 받도록 하는 방법 이외에 또 무슨 뾰족수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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