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남자 디자이너 1호=고인은 1935년 서울 구파발에서 농사를 짓던 부모의 2남3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예술적 기질을 보였다. 음악·미술·연극·시 등에 다재다능했던 그는 학예회의 인기 스타였다. 패션 디자이너가 된 계기에 대해 그는 한 인터뷰에서 “오드리 헵번이 나오는 영화 ‘퍼니 페이스’을 보면서 패션 디자이너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고백했다. 고인은 고등학교를 마친 뒤 디자이너 최경자의 양장점에서 일하던 중 61년 최경자가 국제복장학원을 설립하자 1기생으로 입학해 디자이너 수업을 받았다. 당시 학원에는 30명의 학생 중 남자는 두세 명밖에 없었을 정도로 희귀했다. 1년 후 학원을 졸업하고, 그는 서울 소공동에 ‘살롱 드 앙드레’를 열면서 ‘국내 1호 남자 디자이너’가 됐다. ‘앙드레’는 당시 프랑스 대사관에서 근무하던 외교관이 지어준 이름이었다. 신출내기 디자이너였던 그는 그때부터 해외 진출을 꿈꾸며 외국인의 귀에 친숙한 이름으로 바꿨다고 했다. 그의 본명은 99년 정·관계를 뒤흔들었던 검찰총장 부인과 장관 부인들이 얽힌 옷로비 사건 청문회를 계기로 세간에 알려지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아래위 흰 옷을 차려입고 특유의 콧소리로 말하는 ‘파쏭’ ‘판따스틱’ ‘엘레강스’ 등은 국민 유행어가 됐다.
12일 저녁 별세한 앙드레 김이 지난 5월 3일 중앙일보 토요섹션 j 객원기자로 나서 여배우 윤정희와 인터뷰하던 모습. [박종근 기자]
국내에서도 굵직한 행사에는 앙드레 김 패션쇼가 열리는 것이 당시 트렌드가 됐다. 그 덕에 패션디자이너로는 최초로 대통령 문화훈장(1977)을 받았다.
배우 최은희(왼쪽)·윤정희씨와 대화를 나누는 30대의 앙드레 김. 1970년대 안창호 선생의 아들이자 할리우드 스타 필립 안을 환영하는 리셉션 자리에서 만났다. [중앙포토]
앙드레 김의 패션쇼에는 남다른 매력이 있었다. 그는 패션쇼를 하나의 공연예술로 만들어냈다. 모델들의 캣워크에는 늘 지고지순한 사랑과 가슴 아픈 이별이 담겼다. 정열과 화려한 유혹도 있었다.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드라마’로 꾸며냈다. 김희선·이영애·장동건 등 당대 최고의 스타가 그의 무대를 장식했다. 그는 “나의 패션쇼는 단순히 해당 시즌의 트렌드를 보여주는 상업적 행사가 아니라 예술적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문화행사의 일환으로 봐줬으면 한다”고 말하곤 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개최를 축하하는 의미로 ‘프리뷰 인 상하이’란 이름의 패션쇼를 열었다. 당시 피날레 무대는 배우 장근석·이다해가 장식했다. [중앙포토]
그는 70대의 고령에도 늘 후배 디자이너들을 뛰어넘는 왕성한 활동을 해왔다. 국내외에서 한 해 5~6회의 패션쇼를 열었고, 화장품·선글라스·골프용품·아파트 인테리어까지 ‘앙드레 김’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브랜드화했다. 세탁기와 냉장고 등 전자제품에도 그의 이름이 들어갔다. 그는 늘 “일 앞에서는 10대”라며 “아직도 할 일이 많다”고 자신감을 드러냈다. 올 3월에도 중국 베이징에서 패션쇼를 열었을 정도였다. 유족으로는 82년 입양한 아들 중도(30)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발인은 16일 오전 6시, 장지는 충남 천안 천안공원묘지. 2072-2091.
이도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