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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11면

첼로라는 악기의 소리가 인간의 몸부림 같다는 생각을 한 것은, 첼로 연주자였던 재클린 뒤프레의 삶을 그린 '힐러리와 재키'란 영화를 봤을 때였다. 서로의 영혼까지 공유했던 언니 힐러리와 멀어진 후 재키는 첼로에 집중한다. 첼로는 그녀의 말을 넘어선 육체의 소리였다. 온몸을 뒤틀며 연주하는 재키를 보고 있으면 광기의 슬픔을 넘어, 형극의 대지를 걸어가는 저주받은 인간의 모습이 떠올랐다. 낮게 바닥으로 깔려드는 첼로의 소리는 두려워서 떨리는 살의 울림 같았다.

'격정 멜로'라는 홍보 문구에 그다지 동의하지는 않지만, 현악기로 구성된 '밀애'의 영화음악이 유난히 인상적인 것은 그런 이유다. 불어닥치는 태풍 아래에서 찍었다는 미흔과 인규의 첫 키스. 세상에서 퉁겨져 나온 그녀가 낯선 남자를 받아들이는 순간의 두려움은 불안하게 밀려드는 첼로의 소리에 담겨 있다. '그가 온다면…'. 음악감독 조영욱의 "주인공의 욕망과 감성은 바이올린을, 현실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은 주로 첼로를 이용했다"는 말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주제곡인 존 바에즈의 '도나 도나'를 제외하고 '밀애'는 거의 모두 현악기로 이루어진 음악을 깔고 있다. 유명한 클래식 곡들을 현으로 편곡한 것이거나, 현으로만 이루어진 오리지널 스코어들이다.

이를 테면 핀란드의 민속음악을 현악 사중주로 편곡하여 '허공에서 부리를 물고'라고, 오케스트라 버전으로 꾸며선 '내겐 돌아갈 집이 없어'라고 각각 이름을 붙였다. 북구의 민속음악은 남미의 찬란한 슬픔과는 달리, 얼음 속의 불꽃 같은 느낌을 준다. 그걸 현으로 들으니, 슬픔이 가중된다.

브람스의 피아노 4중주 G마이너를 재구성한 '슬픈 폭력'은 남녀 주인공의 애절한 로맨스를 위한 곡이라고 한다. 브람스의 곡은 아름다우면서도 쓸쓸하다. 아니, 그 쓸쓸함 때문에 더욱 아름다운 것이다. 섹스를 하는 찰나의 육체가 그렇듯이.

미흔과 인규의 사랑은 그 육체를 매개로 넘나드는 사랑이다. 빌라 로보스의 '브라질 풍의 바흐'는 '사랑의 두 번째 이름 혹은 부정'이란 제목으로 바뀌었다. 영화의 정사 장면에서 흐르는 곡이다. 인규의 죽음에서 쓰이는 곡은 비발디의 첼로 협주곡 C마이너를 편곡한 '무상한 것을 위하여'다.

이 음악들은 처연하게 흐른다. 슬프지도, 그렇다고 즐겁지도 않은 느낌으로 '밀애'의 주제를 설명한다는 존 바에즈의 '도나 도나'도 그렇다. 존 바에즈의 목소리는 현의 울림 이상으로 슬프고 또 즐겁다.

대중문화평론가 lotusid@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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