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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조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1936년의 미국 대통령 선거는 여론조사의 역사에서도 획기적인 의미를 지닌다. 당시 가장 있기있던 시사월간지 '리터러리 다이제스트'는 선거를 앞두고 무려 1천만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했다. 이 잡지는 이미 20년부터 32년까지 네차례에 걸쳐 대통령 당선자를 정확히 예측해 권위를 인정받고 있었다.

1천만명 중 응답자는 2백만여명. 조사 결과는 공화당의 앨프리드 랜던 후보가 민주당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후보를 57대 43의 비율로 눌러 이기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 결과는 60.8%의 표를 얻은 루스벨트의 압승이었다. 이 충격으로 리터러리 다이제스트는 결국 폐간되고 말았다.

문제는 조사대상이었다. 전화번호부·자동차등록부와 이 잡지 정기구독자 명부에서 대상자를 뽑았는데, 대공황이 휩쓸고 지나간 당시 전화·자동차를 갖거나 잡지를 정기 구독하는 사람들은 중산층 이상으로 공화당 지지자가 다수였던 것이다.

실수는 48년에도 되풀이됐다. 쟁쟁한 조사기관들이 모두 공화당의 토머스 듀이가 현직 대통령인 민주당의 해리 트루먼을 큰 차이로 이긴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트루먼이 5%포인트 이상의 차이로 승리했다. 트루먼이 '듀이 당선'을 보도한 시카고 트리뷴을 들고 찍은 사진은 미국 정치사에서 가장 유명한 사진 중 하나로 남아 있다.

재작년 미 대선에서는 잘못된 출구조사 결과를 보도한 방송·통신사 간부들이 의회 청문회에까지 불려갔다. 얼마 전 중간선거에서도 조지아·일리노이주 지사와 콜로라도주 연방 상원의원 선거는 조사기관들의 예측이 크게 빗나갔다. 특히 요즘은 전화의 발신자표시·자동응답 기능을 이용해 답변을 기피하는 데다 휴대전화가 워낙 많이 보급돼 전통적인 전화 여론조사는 정확도가 낮아질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렇더라도 후보간 우열을 객관적으로 가리는 방법은 현재로선 여론조사뿐이다. 민주당 노무현 후보와 '국민통합21'의 정몽준 후보가 단일화를 논의하면서 여론조사를 기준 삼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국민경선' '일반 국민 여론조사' '국민·대의원 여론조사'등 헷갈리는 명칭의 뒤에 숨어 있는 꼼수들을 보노라면 저절로 혀를 차게 된다. 수프를 여우는 접시에 담아 내놓고 학은 호리병에 담아 내민다는 이솝우화를 쏙 빼닮은 모양새다.

노재현 국제부 차장

jaiken@joongang. co. 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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