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살길 찾는 세계 기술株 시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경제 04면

세계 기술주 주식시장들이 시장 운영의 실패를 인정한 채 간판을 내리고 기존 거래소시장에 흡수되거나 경쟁력 높이기에 나서는 등 안간 힘을 다하고 있다.

일본에선 지난 8월 나스닥재팬이 문을 닫았다. 소프트뱅크와 미국 나스닥이 2000년 공동 설립했는데 기술주 거품이 꺼지면서 운영수익이 떨어지자 나스닥이 손을 뗐고 오사카증시에 흡수될 운명이다. '유럽의 나스닥'으로 불리던 독일 노이어 마르크트(NM:신시장)도 내년 말까지 간판을 내리기로 했다. 벨기에가 범유럽 기술주 시장을 목표로 세운 이스닥은 지난해 3월 나스닥이 인수해 나스닥유럽으로 재출범했지만 지난해 한 종목도 유치하지 못할 정도로 침체 상태다.

◇기술주 시장도 IT 비중 줄여야=문을 닫을 상황에 처한 기술주 시장들은 정보기술(IT) 업종에 편중됐다는 공통점이 있다. 출범 당시 9개였던 나스닥재팬의 상장종목은 1년 반 만에 82개로 불어났다. 1963년 개설된 자스닥과 98년 도쿄증권거래소가 자스닥을 견제하기 위해 세운 마자즈와 경쟁하기 위해 앞다퉈 닷컴기업을 끌어들여 몸집을 키운 결과다.

NM도 독일의 경제규모를 내세우며 프랑스·네덜란드·벨기에 등의 신생 기술주 시장과 경쟁해 많은 닷컴기업을 유치했다. 17개 종목으로 문을 열었는데 99∼2000년 외국 기업 55곳을 합쳐 2백64개사를 상장시켰다. 지난해 말 3백27개로 불어났던 상장종목이 실적 악화와 내부자거래 적발 등에 따라 올 8월 말 2백72개사로 감소했다.

이와는 달리 나스닥과 자스닥은 침체장에서도 전통 기업을 고루 받아들이며 거래소의 경쟁시장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나스닥의 IT업종 비율은 25%로 전통산업(55%)의 절반에 못미친다. 그러나 코스닥의 IT 비중(41%)은 나스닥의 두배에 가깝다.

◇한계기업은 즉시 퇴출하는 나스닥=나스닥이 주가 하락으로 고전하면서도 세계 증시의 중심을 지키는 것은 건전한 시장 구축에 정성을 쏟기 때문이다. 나스닥은 닷컴 열풍이 한창일 때도 부실기업을 가려 시장에서 퇴출시켰다. 그 결과 나스닥 상장기업은 97년 5천4백87개에서 30% 이상 줄었다. 부실기업을 신속히 퇴출시키는 것만큼 확실한 시장 건전화 방안은 없다는 점을 보여준 것이다.

이와는 달리 다른 나라의 신생 기술주 시장이 실패로 끝난 것은 생존력이 없는 회사의 시장 퇴출을 주저했기 때문이다. 97년 문을 연 NM은 부실기업의 내부자거래와 회계부정이 속출함에 따라 5년반 만에 무너졌다. 최근 국내에서도 코스닥 기업 관련 주가조작과 사기 사건이 부실기업에서 터져나오고 있다.

이달부터 등록 이전 주요주주 지분변동 제한 등 코스닥 안정화 방안이 시행될 예정이지만 약발이 의문시된다. 일정 기간 대주주의 주식 매도를 제한하는 보호예수제가 사실상 2년으로 강화됐지만 사채시장에서 주식을 사고 파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회계조작에도 여전히 속수무책이어서 재무제표만 보아선 부실 여부를 판단하기 어렵다. 증권연구원 엄경식 연구위원은 "대규모 퇴출은 파장이 크기 때문에 어려움이 따르지만 미국 장외시장(OTCBB)처럼 한국도 장외시장(제3시장)의 질을 높이면 완충 장치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전면 재검토 필요한 등록요건=닷컴 열풍에 휩싸여 부실기업을 대거 상장시킨 것이 NM이 실패한 주된 요인이라는 점을 깨달은 독일 증권거래소는 제대로 된 회사를 고르는 작업을 강화했다. NM을 흡수할 예정인 거래소내 2부 프라임에도 엄격한 상장 기준을 요구한다. 회계부정이 많았던 만큼 국제 회계기준을 도입하고 공시규정도 강화하기로 했다. 닷컴 열풍이 꺼지기도 했지만 상장 심사를 철저히 한 결과 지난해 상장기업은 11개, 올해는 한 기업만 상장했다.

상장 심사가 까다롭기로 유명한 나스닥에선 닷컴 열기가 식으면서 신규 상장기업 수도 급감했다. 상장 전 단계에서 경쟁력이 약한 기업들이 스스로 인수·합병을 통해 합치면서 기업수가 줄기도 하지만 심사가 엄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은 '벤처기업 육성에 관한 특별법'을 성전처럼 여기며 부실 소지가 있는 기업들이 여전히 코스닥에 입성하고 있다. 증권업협회 김병재 등록관리팀장은 "기술평가에서 우수기술 기업으로 선정되면 벤처로 인정하는 제도를 바꿔야 한다"고 지적했다. 사업자단체에서 기술평가를 잘 받는 것이 쉽기 때문에 생존력이 없는 기업도 코스닥 등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벤처에 대한 기대가 높았을 때 만든 조건을 요즘 실정에 맞게 손질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8월부턴 주간사가 공모가격을 자율적으로 정하면서 부실기업의 진입이 더 쉬워졌다. 등록 수수료를 챙기려는 증권사가 기업에 대한 실사를 부실하게 해 신규등록 이후 공모가 아래로 떨어지는 종목도 생겨났다. 대우증권 김남인 주식인수본부장은 "부분적으로 문제점을 보완할 게 아니라 등록 관리와 퇴출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포괄적으로 손질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동호 경제연구소 기자

e-news@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