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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득구 죽음의 투혼 한국복싱 일으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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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면

오늘(14일)은 프로복서 고(故)김득구(당시 23세)선수가 레이 붐붐 맨시니(41)의 펀치를 맞고 숨진 지 20주년이 되는 날이다. 당시 그의 트레이너였던 김윤구(47)씨는 아직도 그날의 일을 생생히 기억한다. 김씨는 김현치 전 동아체육관 관장과 함께 미국 라스베이거스 시저스팰리스 호텔 특설링에서 벌어진 김득구의 생애 마지막 경기를 지켜봤다.

그는 "비록 죽음에 이르는 패배를 당했지만 득구로서는 최고의 기량으로, 최고의 투혼으로 치른 경기였다"고 회고했다.

13라운드까지는 난타전이었다. 김씨의 생각으로는 판정까지 갈 경기였다. 13라운드가 끝나고 김득구가 코너로 돌아왔을 때 그는 "득구야, 2라운드밖에 안 남았다. 죽을 각오로 싸워라"라고 독려했다. 김득구는 "알았어요, 사범님"이라고 말한 뒤 입을 꼭 다물고 상대를 노려보고 있었다.

"14라운드에 득구가 나가고 난 뒤 의자를 빼내고 있는데 갑자기 관중의 환호성이 터지더군요."

19초 만이었다. 김득구는 맨시니의 강력한 레프트 훅과 라이트 스트레이트를 턱에 맞고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로프를 붙잡고 간신히 몸을 일으켰지만 레퍼리의 카운트는 끝나 있었고 그는 다시 바닥으로 쓰러졌다.

"뛰어올라가보니 득구가 신음하고 있었어요. 글러브와 신발 끈을 풀어주면서 득구야, 득구야 계속 불렀지만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틀 후 먼저 귀국길에 오른 김씨는 기내에서 김득구의 소생 가망이 없다는 신문기사를 봤다.

"화장실에서 얼마나 울었던지요-. 내가 그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이 하필이면 '죽을 각오로 싸워라'였어요. 그 말이 그렇게 후회될 수가 없었습니다. 돌아가면 복싱을 그만두리라고 결심했죠."

하지만 서울 문화체육관에서 치러진 김득구의 장례식장에서 그 결심은 허물어지고 말았다.

"붕대를 칭칭 감고 관에 누워 있는 득구의 얼굴을 보니 모든 게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김득구는 미국으로 떠나기 며칠 전 1m 크기의 검정색 관을 만들어 체육관으로 가져와 "맨시니를 이 관에 넣든지, 아니면 내가 여기 들어가든지 하겠다"고 말해 김씨가 "복싱하러 가는 거지, 뭐 장사지내러 가느냐"며 꾸짖고 부숴버린 일이 있다고 한다. 이런 일들이 다 제 운명이 아닌가 싶더라는 것이다.

김득구의 투혼에 감동한 미국인 프로모터들은 이후 한국 복서들을 앞다퉈 미국으로 초청했고 한국 복싱은 아이로니컬하게도 중흥기를 맞았다.

문병주 기자

byung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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