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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빨리'와 '못 먹어도 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지난 주 한국의 '세계 1위'를 널리 재확인하는 행사가 있었다.

초고속 인터넷 가입자 1천만명-.

1998년 국내 최초로 케이블 모뎀이 등장한 지 4년, 99년 세계 최초로 ADSL 서비스를 시작한 지 3년 만이니 정말 초고속이다. 우리의 초고속 인터넷 보급률(인구 1백명당 17.16명, 2001년 말 기준)은 미국의 4배, 일본의 8배다. 전국 읍·면 지역의 98%에 초고속 인터넷이 들어가 있다. 자랑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세계 1위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우리는 주가지수 선물(先物)·옵션 거래 규모에서 으뜸이다. 그것도 세계 2위와 '게임이 안되는' 첫째다.

지난해 한국에선 무려 8억5천5백만 계약의 주가지수 선물·옵션이 거래됐다. 2위인 독일의 유렉스에선 5억4천2백만 계약이 거래됐고, 선물·옵션의 '원조'로 역사가 1백년이 넘는 미국 시카고의 두 거래소가 그보다 크게 뒤지는 3·4위였다. 선물은 96년, 옵션은 97년에야 처음 시작한 한국이니 이 역시 정말 초고속이다. 한데, 이것도 과연 자랑스러운 일일까?

이 두가지 세계 1위에는 한국의 독특한 환경과 한국인들의 유난한 성격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80년대 고(故) 김재익 경제수석 시절부터 뿌리를 찾을 수 있는 통신 기반시설 투자는 인터넷의 가장 든든한 밑바탕이 됐다. 여기에 좁은 땅을 비집고 살아온 주거 행태·환경, 뭐든지 빨리 빨리가 아니면 속 터지는 조급성이 인터넷 확산에 불을 붙였다.

전 가구의 60%는 아파트 등 공동주택에 살고, 90%는 전화국으로부터 4km 안에 산다. 넓은 땅에 퍼져 사는 미국에서 철도·전신이 일찍 발달한 것처럼, 인터넷 보급에는 '비좁은 한국'이 천혜의 환경이다.

초고속 인터넷을 신청하면 바로 바로 깔려야지 며칠만 늦어도 '난리'를 치는 우리들은, 인터넷에 접속했을 때 바로 바로 열려야지 조금만 늦게 떠도 클릭 클릭한다.

선물·옵션에는 또 다른 한국인의 특성이 나타난다. 바로 '도박성·투기성'이다.

선물은 원래 현물 시장에서의 가격 변동 위험을 피하기 위해 미국에서 고안됐다. 앞으로의 주가를 종잡을 수 없을 때, 현물(現物)을 사며 선물을 팔거나 현물을 팔며 선물을 사는 식이다. 그런데 이런 거래에 응할 상대방이 있어야 시장이 굴러갈 터이고, 그런 상대방이 바로 투기성 거래를 하는 사람들이다. 쉽게 말해 앞으로 주가가 오를지 내릴지 돈을 걸고 내기를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을 절대 나쁘다고 할 수 없다. 오히려 그런 투기세력들은 시장을 서게 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데 한국의 선물·옵션 시장에는 위험회피 거래는 별로 없고, 대박 한탕을 노리는 거래들만 판을 치고 있어 문제다. 그것도 절반 이상이 개인들에 의한.

그러니 거래규모 세계 1위이면서도 외국인 거래 비중은 10%를 조금 넘을 뿐인 '우리만의 선물·옵션'이고, 개인이 증권사를 통해 거래를 하다 크게 잃으면 그냥 튀어버려 증권사가 떠안은 미수금이 올 상반기에만 2백16억원이다. 조금만 더 통들이 커졌다간 대형 금융사고가 터질 판이다.

이쯤 되면 초고속 인터넷 세계 1위를 바탕으로 '온라인 주식거래 비중이 67%로 일본의 3.8%, 대만의 7.6%를 크게 앞선다'는 자랑도 별로 내세울 게 못된다.

초고속 인터넷이나 선물·옵션 같은 금융시장은 한국·한국인의 특성에 맞는 미래지향적 하드웨어·소프트웨어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인터넷에 무슨 콘텐트를 담고, 인터넷을 어떻게 '굴뚝'에 접목시키며, 언제야 버젓한 국제금융시장을 한국에 세울 수 있을까 등은 영 다른 얘기다.

21세기 지식정보사회의 글로벌 리더-.

좋은 말인데, 그런 선진국이 되려면 결국 국민의식이 최후의 관건이고, 국민성의 패러다임 '보완'이 있어야 한다.

sg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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