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주말극'내 사랑 누굴까' 방송작가 김 수 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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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연금술사''흥행 제조기''원고료가 가장 비싼 작가''독설의 작가'…. 방송작가 김수현(61)씨를 따라 다니는 수식어는 많다. 그녀는 역대 최고 시청률을 자랑하는 '사랑이 뭐길래'(59.5%)를 비롯해 내놓는 작품마다 화제를 불러 왔다. 하지만 올 초 2년 만에 펜을 잡은 KBS 주말극 '내 사랑 누굴까'가 방영 초 부진을 면치 못하자 "김수현 시대가 끝난 것 아니냐"는 얘기가 돌았다. 그런데 최근 '김수현 신화'가 되살아나고 있다. 10%대 초입에 머물던 시청률이 지난 주에는 30%대까지 치솟았다. 특히 폭력·불륜·치정 등 자극적 소재가 넘치는 안방극장에서 정통 홈드라마로 거둔 성적이어서 주목된다.

평소 언론과의 인터뷰를 꺼려온 작가를 여러 차례 조른 끝에 지난 6일 여의도 한 음식점에서 만났다. 그녀의 말투는 독특했다. 자기 작품 속의 대사처럼 군더더기가 없었다. 짧지 않은 시간, 작가의 입에선 담배가 떨어지지 않았다.

-김수현 신화가 살아난다고 합니다.

"신화? 그런 것 없어요. 내가 언제 신화 얘기한 적 있나? 타이거 우즈라고 매번 우승하진 않지."

-대(大)작가라도 시청률엔 민감할 것 같은데요.

"나 시청률에 목 매달고 산 적 없어요. 지금 '내 사랑 누굴까'가 얼마인지도 몰라요. 내 길을 갈 뿐이야."

김씨는 작가가 시청률에 매달려 헉헉대는 건 바보 짓이라고 잘라 말했다. 작가 생명을 스스로 단축시키는 일이라는 것이다. 정상에 있는 자의 여유에서 나온 말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형형한 그녀의 눈은 소신과 확신에 차 있었다.

-'불꽃''목욕탕집 남자들'도 그랬지만 드라마가 중반 이후에 탄력을 받는데요.

"시청자들이 늦게서야 극의 빠른 전개와 복합적인 구도에 적응하는 걸 거예요. 요즘 드라마들이 하도 스낵 먹듯이 쉽게 만들어지는 바람에 시청자들이 단순 구도에 익숙해져 있어요. 문제야, 문제."

-다른 드라마는 자주 보나요.

"잘 안 봐요. 재미가 있어야지. 자극적인데다 비틀린 인간상이 활개치고 있어요. 평생 옆에 스치기도 싫은 인간형이 득실득실해. 교훈도 없고. 그게 드라만가?"

김씨는 후배들의 작품에 대해 할 말이 많은 듯했다. 그는 요즘 작가들이 "책을 너무 안 읽고 생각이 부족하다"고 일침을 놓았다. 짜깁기하고 뒤집는 데는 익숙하지만, 독창성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예전처럼 이번 '내 사랑 누굴까'에서도 대가족을 등장시켰습니다.

"가정은 모든 것의 시작이고 끝이에요. 가족 문제가 좋으면 다 좋을 수 있다는 게 내 믿음이에요. 사실 내 드라마 속 가족들처럼 사회가 구성되면 뭐가 문제겠어. 그래서 작정하고 쓰는 거지요."

김씨는 '내 사랑 누굴까'에서 세대간의 이해를 말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런데 젊은 사람들은 마음을 여는 데 너무 인색하다고 했다.

얼마 전 극중에서 맏며느리(이승연)가 굴비 네 마리를 한꺼번에 구워 할머니(여운계)에게 호되게 혼난 적이 있다. 방송이 나가자 "그까짓 굴비 가지고 뭐 그러느냐"는 항의가 많이 들어왔다. 하지만 작가는 "고통의 시대를 살아 온 할머니에겐 당연한 행동 아니냐"고 묻는다.

-나이가 들면서 글 쓰는 게 어렵지 않습니까.

"전혀. 아직도 책상에 앉으면 술술 나와요. 일주일에 20시간 정도 쓰는데, 요즘엔 밤샘 작업은 안해요. 샐러리맨 다 됐어요."

-소재를 찾기 위해 취재를 다닙니까.

"그럴 필요 없어요. 내 마음 속에 있는 수많은 인간상을 들여다보면 돼요. 판을 잘 짜주면 그들끼리 어우러지고 놀고 춤추지."

-연기자들이 토씨 하나 틀려도 화를 낸다고 들었습니다.

"대사의 음정, 장단이 틀리면 안돼요. 감정선이 무너지니까. 요즘 우리 말이 너무 망가졌어요. 난 매주 대본 낭독 연습에 한번도 빠진 적 없어요."

그녀가 주도하는 '리딩(Reading)'시간은 배우들에겐 공포의 시간이다. 대사를 잘못 말하면 나이 고하를 불문하고 작가에게 혼난다. 1980년대 '사랑과 진실'에 출연했던 한 스타가 혼이 나자 연습 도중 화장실로 뛰어가 고래고래 욕을 해댔다는 얘기가 전설처럼 남아 있다.

-얼마 전 작고한 탤런트 남성훈씨와 인연이 깊으셨다더군요.

"내가 정말 아우처럼 생각했던 배우예요. 용모도 깔끔하고, 대사도 담백하게 하고. 정말 아까운 사람이야. 사실 나와는 투병 중에도 연락을 주고받았어요. 근데 상가에는 못가겠더라고. 고인이 없는 자리의 북적거림이 싫었어요."

-물의를 빚었던 이승연과 이태란을 캐스팅한 건 모험 아니었나요.

"나를 싫어하는 사람도 많지만, 그 친구들 안티 세력도 대단하더군. 둘에게 얘기했죠. 낭떠러지에 떨어지더라도 함께 가자고. 둘 다 목숨 걸고 연기하잖아."

-'여우와 솜사탕'과 관련된 표절 사건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요.

"본안 소송 중이에요. 아주 느리게 진행되고 있어요. 하지만 그 전에 내가 죽지 않을 테니 끝까지 갈 겁니다."

-가장 좋아하는 자신의 작품은.

"'사랑과 야망'. 기회가 닿으면 리메이크하고 싶어요."

-앞으로 계획은

"길어야 30부작 정도 되는 작품만 하고 싶어요. 50회 넘으니까 피로가 회복이 안돼요. 이번에도 멀미 나는 걸 참으면서 썼지. 아름다운 가족과 예쁘고 맑은 사람들을 그리고 싶어요. 사람들이 내 드라마 보고 좀 열심히 살자는 생각이 들도록."

50부 예정이었던 '내 사랑 누굴까'는 인기에 힘입어 80부를 넘겨 연말까지 연장 방영된다. 방송국 리딩에 가야 한다며 일어서던 작가가 한마디 자존심을 던졌다.

"난 절대 흥행 코드 안 따라 가. 정통이란 중요한 거야. 아무리 퓨전 시대라지만 나 같은 사람 하나쯤은 있어야 되지 않겠어요?"

이상복 기자 jizhe@joongang.co.kr

김수현은…

▶1943년 충북 청주 출생

▶65년 고려대 국문과 졸업

▶68년 MBC 라디오 극본 현상 공모 당선

▶72년 '새엄마'로 제1회 방송대상 극본상 수상

▶75년 '신부일기'로 방송대상

▶84년 '사랑과 진실'

▶87년 '사랑과 야망'

▶90년 '배반의 장미'

▶92년 '사랑이 뭐길래'

▶93년 '산다는 것은'

▶94년 '작별'

▶95년 '목욕탕집 남자들'

▶97년 '사랑하니까'

▶99년 '청춘의 덫'(78년 작품 리메이크)

▶2000년 '불꽃'

▶2002년 3월∼현재 '내 사랑 누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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