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묻지 마세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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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작고한 나애심씨가 부른 '과거를 묻지 마세요'는 지금 60대 이상 된 세대에게는 흘러간 추억의 노래다. "한 많고 설움 많은 과거를 묻지 마세요"라는 가사는 그 시대, 고달픈 세상살이에 시달렸던 사람들의 가슴에 와 닿았다. 이 노래 얘기를 새삼 꺼내는 까닭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대통령 선거일을 불과 40여일 남겨놓고 이합집산에 여념이 없는 대선 정국의 양상이 그런 노랫말을 연상시켜주기 때문이다. 이른바 '철새' 정치인들이 잊고 싶은 것이 '한 많고 설움 많은' 과거일 리야 없겠지만 이유야 어떻든 과거를 묻지 말아달라는 소망만은 간절할 듯싶다.

그러나 요즘 정국 기상도를 보면 그런 정치인들이 굳이 자신들의 과거를 묻지 말아달라고 주문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이념 성향이나 정책의 차별성으로 경쟁하기보다 오로지 세 불리기에 명운을 건 후보들이 "과거는 불문에 부치겠다"며 문을 활짝 열어놓고 "어서 오라"고 손짓하면서 시대의 소명에 부응하는 용기 있는 결단이라는 대의명분마저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대선 정국의 행태는 언뜻 보기에 관용의 정치처럼 비치기도 한다. 과거는 일절 묻지 않고 누구든 뜻을 같이한다면 정치 동반자로 받아들이는 자세야말로 관용의 정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렇게 보면 지금처럼 관용의 정치문화가 만개한 때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우리의 경험은 이 같은 행태가 오직 당사자들의 정치적 이해관계의 소산이지 관용의 정치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관용이라는 가면을 쓴 '사이비'관용의 정치일 뿐이다. 정적이나 정치적 비판세력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들의 주장도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잘못을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 경쟁세력을 무력화시킴으로써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정략이며 정치적 거래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이비' 관용의 정치는 국가와 사회의 기강을 어지럽게 만든다. 왜 그럴까? 군사 독재 정권의 하수인으로 이 땅의 민주주의를 짓밟고 인권 탄압에 앞장섰던 사람, 유신만이 살길이라고 길길이 날뛰던 사람, 정권이 바뀔 때마다 변신을 거듭하면서 이문 챙기기에 이골이 난 사람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이비'란 관용의 정치는 역사 바로 세우기에 역행하는 행태다.

아무리 우리 국민이 너그럽다고 할지라도 역사의 심판을 받아 마땅한 사람들에게 면죄부를 줄 수 있는 권한을 정당이나 후보자에게 위임한 적이 없다. 국민들은 침묵하며 주시하고 있을 뿐 그런 행각을 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직 대통령선거에서 이기기만을 위해 아무하고나 손잡는 행위는 국민으로 하여금 정치를 외면하게 만들 뿐이다. 그래서 면죄부를 주듯 "과거를 불문에 부치겠다"며 반민주적이고 부도덕한 행위로 국민의 지탄을 받는 사람까지 제 편으로 끌어들이는 선거전략은 소수의 표를 위해 다수의 표를 잃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이번 대선 정국에서 '사이비' 관용의 정치 행태를 보면서 우리가 무엇 때문에 일제 식민 치하에서 반민족 행위를 한 자들을 역사의 심판대에 세우고 군사 독재정권 아래서 반민주·반인권의 기수 노릇을 한 자들을 역사의 법정에 서게 하려 했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면 망발일까.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이비' 관용의 정치는 목적을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정당화시켜 줌으로써 우리 사회의 규범을 뿌리째 흔들어 놓고 있다.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들이 그런 모범을 보일진대 보통사람들이 그같이 전도된 규범을 일상적으로 행하고 있다고 한들 어떻게 비난할 수 있으며, 무슨 말로 바로잡을 수 있겠는가.

대선 정국이 국가와 사회의 기강을 무너뜨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해놓고 누가 대통령이 된들 건전한 사회를 만들 수 있겠는가. 대통령이 설득력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해서야 될 일이 없다. 목적을 위해 어떤 수단과 방법도 정당화시키는 정치권의 행태는 부메랑이 돼 정치의 발목을 잡을 것이라는 점을 숙고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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