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없고 컴퓨터만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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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8면

기관투자가들이 프로그램 매매에 의존해 하루 하루 버티고 있다. '로봇이 펀드를 운영해도 될 정도'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기관투자가들이 증시 전망과 펀더멘털(기초 여건)에 따라 매매 결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선물과 현물 지수의 차이에 따라 기계적으로 주식을 매매하고 있기 때문이다.

프로그램 매매란 선물과 현물(주식)의 가격을 비교해 가격이 비싼 쪽을 파는 대신 가격이 싼 쪽을 매수하는 것으로 투자 원금을 보전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반면 큰 이익을 볼 수 없다.

때문에 외국인은 거의 프로그램 매매를 하지 않으며 국내 기관투자가들이 사실상 독점하고 있는 형편이다.

지난 4일 종합주가지수가 25포인트 오른 것은 순전히 기관의 프로그램 매매 덕분이었다. 이날 기관은 프로그램 매매를 통해 2천3백5억원(차익 거래 기준) 어치 순매수했다. 이날 기관이 전체적으로 순매수한 금액은 2천26억원으로 프로그램 매수 금액보다 작았다.

반대로 5일 주가는 프로그램 매도로 인해 떨어졌다. 기관투자가들이 순매도한 금액은 7백91억원이었는데 프로그램 매도 금액이 1천4백64억원이었다. 일부 기관들은 순매수했지만, 프로그램 매도 물량이 워낙 커 기관 전체적으로는 순매도를 기록한 것이다.

<그래프 참조>

기관투자가들이 이처럼 프로그램 매매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은 자신감이 없기 때문이다. 자금 사정이 외국인만큼 넉넉하지 못한 점도 한 요인으로 지적된다.

또 프로그램 매매 의존도가 높아짐에 따라 꼬리(선물시장)가 몸통(주식시장)을 흔드는 이른바 '왝 더 독'현상이 빚어지고 있다.

가령 외국인이 주식을 팔면서 선물을 대거 매수해 선물 가격이 올라가면, 기관들은 선물에 비해 값이 싸진 주식을 매수해 주가를 끌어올린다.

반대로 외국인이 주식을 매수하면서 선물을 많이 매도하면 기관은 선물을 매수하는 대신 주식을 내다팔아 주가를 급락시킨다. 선물시장의 움직임이 주가를 좌우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4일 주가 급등은 외국인이 선물을 많이 사들였기 때문이고, 5일 주가 하락은 외국인과 개인이 선물을 내다팔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왝 더 독' 현상은 미국·일본 등 선진국 시장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A투신의 한 관계자는 "기관은 상승 또는 하락 추세가 확인되기 전까지는 안전한 프로그램 매매에 의존하게 마련"이라며 "특히 매매 수수료 부담이 작은 증권사들이 프로그램 매매를 선호하고 있다"고 말했다.

얼마 전 국내 증시를 탐방한 미국계 헤지펀드(단기 투자를 주로 하는 펀드)의 펀드매니저는 "한국의 기관투자가는 진정한 의미의 기관투자가로 볼 수 없다"며 "독자적으로 시황을 판단하지 못하고 순간 순간의 주가 움직임에 휩쓸려 우왕좌왕하는 돈 많은 투자가일 뿐"이라고 비꼬았다.

이희성 기자

budd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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