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도 '카드빚더미' 몸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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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미국의 금리가 사상 유례없이 낮은 수준을 보이면서 가계빚과 개인파산이 덩달아 급증하고 있다.

빚갚을 능력을 감안하지 않은 채 낮은 금리에 현혹돼 주택과 자동차 등 목돈이 들어가는 품목을 다투어 구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현재 미국 정부가 금리인하를 통한 소비확대를 경기 활성화의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이 와중에서 가계의 부채부담만 계속 늘고 있고, 이것이 앞으로는 오히려 소비를 위축시켜 경기 활성화의 발목을 잡을 가능성이 크다"고 경고하고 있다.

연방준비은행(FRB)의 통계에 따르면 지난 8월 말 현재 미국 내 금융기관과 할부판매 회사 등에서 빌려준 전체 소비자 대출규모는 1조7천3백억달러로 5년 전보다 40% 늘어나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8%대를 웃돌던 주택저당대출(모기지 론) 금리가 5%대로 떨어지고, 자동차 할부판매 금리도 8월 말 현재 2.23%로 낮아지면서 신규 구입이 대폭 늘어났기 때문이다.

일부 자동차 회사들은 자동차 판매를 늘리기 위해 무이자 할부판매 캠페인까지 벌이고 있다. 그러나 미국 가계의 가구당 소득은 부채 증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증가속도가 느리다. 그 결과 소득에 대한 가계빚(이자 포함)의 부담 비율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전체 수입에서 대출금과 이자, 분할납부금 등이 차지하는 비율은 1997년 13.3%에서 지난해 14.2%로 뛰어 올랐고 올해 말까지는 14.6%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가계부채 전문 조사기관인 마이베스타는 지난 4일 "현재 미국 가계의 가구당 월 소득을 1백으로 잡을 경우 한달에 나가는 돈(총 지출액)은 1백22로, 소득을 넘어선 지출은 결국 이미 모아놓은 저축을 까먹거나 빚으로 메우고 있는 셈"이라고 밝혔다.

이 기관은 또 미국 소비자의 55%가 '금리를 따지지 않고 상품을 구입한다', 25%는 '신용카드 내역서를 보지 않는다'는 설문조사 결과를 소개하고, "저금리에 편승한 무분별한 상품 구입이 결국 부채 증가로 이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머니지 최근호는 미국 내 신용카드 빚이 개인은 평균 2천4백11달러, 가구당으로는 평균 8천3백67달러에 이른다고 보도했다. 이는 10년 전과 비교할 때 거의 세배가 늘어난 셈이다.

이 잡지는 또 신용카드 금리가 5년 전보다 2.6%포인트 낮아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11.28%(8월 현재)로 높은 수준이어서 과다한 카드빚이 가계부채 증가의 악성요인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가계빚이 늘면서 개인파산 건수도 급증하고 있다. 개인파산 신청은 지난해 1백49만2천여건으로 2000년보다 19% 늘어났고, 올해 2분기에도 개인파산 건수가 40만6백건으로 분기로는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미국 파산연구소 관계자는 "그동안 미국 경제는 투자·생산성·소득증가로 구매심리가 함께 높아져 선순환을 그리는 구조였으나 지금은 소득증가는 없이 금리인하만으로 인위적인 소비확대를 꾀하고 있다"며 "경기가 살아날 시점에 그동안 누적된 부채부담 때문에 소비가 위축될 가능성도 있다"고 밝혔다.

워싱턴=이효준 특파원

joon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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